◇ 지난1일 복원된 청계천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도심의 명물로 부상하고 있다. <사진제공^중구청 송기방씨>
도심 한가운데서 상쾌하고 알싸한 가을바람에 실려 자연 내음이 물씬 밀려온다.
시원스럽고 청아한 물소리는 흡사 산골짜기 어디메쯤에서 한가롭게 걸터앉아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지난 10월1일 청계천 준공으로 인해 상상 속에서나 그려볼 법했던 서울에서 자연인으로 살고 싶어하는 많은 시민들의 꿈같은 소망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자연학습장과 역사적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청계천, 알고 가면 100배 즐거운 알찬 정보를 소개한다.
가을바람에 자연내음 물씬
도심서 즐기는 특별한 여유
역사ㆍ문화 어우러진 휴식처
◆ 청계천은 어떤 곳
청계천은 인왕산과 백악산의 남쪽 기슭과 남산 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서울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며 동대문을 지나 중랑천과 만난 후,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총 길이(청계광장∼중랑청합수지점)8.14km의 자연하천이자 인공하천이기도 하다. 청계천은 서울을 지리적으로 나눌 뿐만 아니라 정치ㆍ사회ㆍ문화적으로 나누고, 또한 서울 사람을 모이게 했던 물길이었다.
조선시대, 양반가와 주요 관청이 들어섰던 북촌과 서민과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터를 잡았던 남촌이 청계천을 기준으로 나뉘어졌고, 종로와 을지로 등 도성의 주요 간선도로가 청계천을 기준으로 설계됐다.
또한 종로의 시전과 인접한 청계천 다리 주변은 상인과 도성민의 경제활동으로 늘 활기가 넘쳐났으며, 천변은 서민들의 집단 취락지로서 서울 최고의 인구밀집지역이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사람들은 청계천의 수많은 다리 위에서 다리밟기, 연날리기, 편싸움 등을 즐겼으며, 이때는 왕조차도 도성 안 통행금지를 폐지해 줄 정도로 청계천은 축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청계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도성의 생활하수를 모아 한강으로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청계천 치수의 핵심은 강바닥에 쌓인 토사를 퍼서 강바닥을 깊고 넓게 하는 준설작업과 제방을 튼튼하게 해 홍수 피해를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준설작업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하수도를 묻고 위생과 도시 미관에 좋지 않았던 청계천을 덮는 '복개공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1978년까지 수차례의 공사 끝에 청계천은 비로소 땅 속에 묻히게 됐고, 그로써 청계천은 서울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또한 늘어난 교통량을 소화하기 위해 세운 청계고가도로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으나, 이로 인해 청계천은 콘크리트 더미에 두 번 묻히게 되었다.
■ 청계천 명소 8선
분수ㆍ소망의벽ㆍ빨래터 명물 자리매김
▲청계 광장
청계천 시점부인 태평로 입구에 가면 분수가 시원스레 춤을 추며 사람들을 반기는 청계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시민들의 휴식공간이자 문화공간으로 조성된 이곳은 총 2천100여평 규모로 광장과 분수, 탐방로 등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청계광장에는 볼거리가 많은 점이 포인트. 진입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만남과 화합을 상징하는 8도석과 청계천을 600분의 1로 축소해 놓은 미니어처를 구경할 수 있다. 또한 프로그램에 따라 분수 높이가 달라지는 프로그램 분수와 벽면을 타고 흐르는 청계 마당 벽천도 눈에 띈다.
특히 청계광장은 양쪽 도로가 돌 조각으로 포장돼 있어 주변 수변공간과 도로가 광장과 어우러져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지고 전체적인 청계천의 분위기도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광 통 교
자연이 살아 숨쉬는 녹지 위로 잃어버렸던 역사도 함께 재탄생 했다. 무엇보다 수십여년간 교각 밑에서 묻혀있었던 청계천 다리의 복원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의미가 크다. 이 중 조선시대 많은 사람들이 다녔던 번화가이자 청계천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광통교는 단연 눈에 띈다.
모전교와 광교 사이에 위치한 이 다리는 원래 있던 자리보다 150여m 옮겨지긴 했지만, 돌에 정교한 조각들이 남아있고, 여러 시기에 걸쳐 청계천 준설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어 역사적 사료로도 가치가 있는 곳. 다리에 새겨진 울툴불퉁한 흔적을 만지면서 건너본다면 조선시대 이 다리를 건넜을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광교를 조금만 지나면 길이 192m, 높이 2.4m의 세계 최대 규모인 도자벽화가 장통교를 중심으로 좌안 옹벽에 설치돼 있다.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환갑을 위해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화성(수원)을 다녀온 후 그 의전행렬을 상세하게 기록한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가 바로 그것.
김홍도 등 당대의 일류 화가들이 참여, 왕조의 위엄과 질서가 장엄하면서도 자유롭게 표현됐다고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왕실 기록화이자 한 폭의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이 반차도에는 당시 행차의 격식과 복식, 의상, 악대구성 등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반차도는 프롤로그, 서울의 옛 지도인 수선전도, 반차도, 에필로그의 4개 부분으로 구성돼 있으며, 한글과 영문 해설판이 있어 일반인이나 외국인들도 거부감 없이 감상할 수 있다.
▲고사분수와 문화의 벽
고사분수는 오간수교 상류의 평화시장 앞 하천에 설치돼 있다. 65개 노즐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높이의 물줄기가 빨강, 노랑, 파랑, 흰색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과 어우러져 화려한 색동저고리를 연상케 한다.
고사분수 주변에는 야외무대와 천변 스탠드, 문화의 벽, 색동벽, 조선 영조 때의 개천 준설 그림인 준천도, 영조어필 등이 조성돼 있어 청계천 완공 이후엔 동대문 상권과 이어지는 문화체험 공간으로도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오간수문 상류에 위치한 문화의 벽은 가로 10m, 세로 2.5m의 규모로 자연ㆍ환경을 주제로 한 현대 미술가 5인의 작품이 조화롭게 표현돼 있어 수변에서 현대 미술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간수문
문화의 벽을 지나면 옛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오간수문을 만날 수 있다. 오간수교 하류 왼쪽에 설치된 오간수문은 고사분수나 벽천과 달리 물이 물넘이석을 넘어 수조에 고이도록 했다. 무엇보다 수조 바닥에 조명을 설치, 밤이면 불빛이 은은하게 퍼져나오면서 바닥과 오간수문을 비춰 아름다움을 뽐낸다.
원래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인 동대문 옆 성곽에 설치된 5개의 수문으로, 수문 앞에 널돌을 걸쳐놓아 널다리 기능을 하도록 한 구조물이다. 청계천변에 설치된 오간수문은 전통적인 오간수문 이미지를 살려 5개 수문과 홍예 아치를 재현했다.
▲청계 빨래터와 소망의 벽
청계천엔 세탁기가 일반화된 지금은 보기 힘든 낯설면서도 정겨운 장소인 빨래터도 있다.
옛 아낙네의 삶의 일부였던 빨래터의 모습을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서 만날 수 있다. 실제 이곳에서 빨래를 할 수는 없지만, 어른들과 추억을 나누고,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해주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빨래터의 추억을 뒤로하고 영도교와 황학교를 지나면 서울시민의 꿈이 담긴 소망의 벽이 나타난다. 소망의 벽에는 시민들이 각자의 소망을 담아 그린 2만여장의 타일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황학리듬벽천과 비우당터널분수
황학 리듬벽천은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축 위에서 물이 넘쳐 벽을 타고 흐르는 형태로, 물고기가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수경시설과 함께 저수변에는 목재 데크를 설치, 시민들이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비우당 터널분수는 5m 높이의 석축 위에서 물을 분사해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분사된 물은 청계천변에 조성된 산책로 위를 넘어 포물선을 그리면서 청계천으로 떨어지도록 설계됐다. 폭 50m의 비우당 터널분수는 총 42개의 노즐이 설치돼 있으며, 물줄기의 분사 거리는 16m에 이른다.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의 성북천 합류지점 우측에 위치해 있으며, 청계고가도로를 걷어낼 당시 철거하지 않은 일부 교각이 남아있어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청계천 문화관
성동구 마장동 시설관리공단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 복원의 전 과정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지하2층 지상4층 규모로 상설전시장, 기획전시실, 카페, 세미나실 등을 갖추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 청계천 판자촌을 재현한 모형, 청계천 복원 동영상 등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