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식 회장이 부친 김정로 선생이 간직했던 80여년 된 태극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제63주년 광복절을 맞아 본지에서는 독립투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구에 묻혀 살고있는 김성식(72) 회장을 만났다. 김구 선생과 함께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그의 부친 故 김정로(金正魯) 선생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하는등 역사적 증거가 충분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독립 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남긴 발자취를 통해 그 당시 역사적 상황을 재조명해 보고 그의 아들로 살아온 김 회장의 인생역정도 들어봤다.
김구ㆍ김좌진 장군등과 독립운동 전개
부친 아직도 독립유공자 인정 못 받아
전북 순창군 동계 출신인 김성식 회장의 부친 故 김정로(金正魯) 선생은 광주고보(현 광주일고)에 입학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했다. 평소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김 선생은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주모자의 한명으로 낙인찍혔다. 일본 순사를 피해 학교를 다니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당시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김구 선생이 있는 상해임시정부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중국 용정을 오가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 김구 선생과 영원히 조국을 위한 뜻을 함께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경교장에서 총탄에 맞아 서거하면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그 후 김정로 선생은 조국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정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33세의 나이로 전북 순창에서 출마,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조국의 독립과 앞날을 걱정했던 그는 전북 전주에서 45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 조국과 이별하게 된다. 그 후 김성식 회장은 1988년 부친을 대신해 광주일고에서 명예졸업장을 받기도 했다.
그가 가담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3일 전남 나주와 광주를 통학하던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이 충돌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광주항일 학생 독립운동이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해 일어났던 대표적인 민족운동의 하나로 전국 확산의 도화선이 됐으며, 3·1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사건이다.
당시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그의 부친은 1943년 주민의 밀고로 43명의 동지들과 감옥생활을 하게 되는 불운을 맞는다. 함께 구속된 할아버지, 큰아버지는 1년여 만에 석방됐으나 김 선생은 미결수로 남아 158일 동안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고 뒤늦은 재판에서 1년형을 선고 받고 투옥됐지만 형기를 마치기 전에 해방이 됐다.
김 회장은 7살 되던 해 할머니를 따라서 전주 교도소에서 면회를 하면서 아버지 얼굴을 처음 봤는데 지금도 그 당시 아버지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죄수복을 입고 용수를 쓰고 나온 그때의 아버지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이 아이는 왜놈(일본)학교에 보내지 말고 최병심 유림학자에게 한문 공부를 배우게 해달라’”며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조국이 해방되면서 석방된 김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김구 선생과 여운영, 오광선 독립군 부사령관, 이범석 장군등과 함께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아지트가 파고다 공원옆 김지현씨 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활동이 부자연스러웠던지 독립투사였던 오광선 지청천 김정로씨등이 금광거부 최창학씨에게 사무실 제공을 권유, 김구 선생이 경교장을 쓰게 됐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부친 김 선생은 생을 마감 할 때까지 항상 김구 선생을 보좌해 왔으며, 당시 일부 신문에서는 비서였다고 소개되기도 했다고 한다.
재판 기록에도 남아 있는 김정로 선생의 원래(호적) 이름은 ‘정규’. 고종황제 시종무관이었던 이중명(李重明) 선생에게서는 ‘정두’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김구 선생으로부터는 ‘철혈남아(鐵血男兒)’라는 휘호와 함께 하사 받은 이름이 바로 이 ‘정로(正魯)’라는 이름이다. 따라서 부친은 정규, 정로, 정두 3가지의 이름을 같이 썼다고 한다.
또한 한 가운데 마음 심(心)자를 쓰고 그 왼쪽에 ‘조국혼(祖國魂)’, 오른쪽에는 ‘경세종(警世鐘)’이란 글귀를 부채에 직접 써 주었다고 한다.
김 회장이 처음 김구 선생과 마주 했을 때가 9살이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동지새끼야, 동지새끼야 하면서 얼마나 예뻐해 주셨는지 모른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김지현 선생의 가옥(현 파고다 공원 뒤)을 배경으로 한 신생계 창립 기념사진에서도 김구 선생과 김정로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김 회장은 김구 선생이 부친에게 했던 말 중에 “윤봉길 의사 다음에 대를 이을 나라에 쓸 수 있는 재목(材木)”이라고 말할 정도였다며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렸다.
부친 김 선생은 전주 건지산(현 전북대 자리)에 ‘건지사’라는 사찰을 세우고 고종황제의 친필과 신위, 80여년된 태극기를 모시기도 했다. 현재는 전북 진안의 향교인 이산묘의 회덕전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선친에게 고종황제의 친필과 태극기는 독립 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는 상징이었으며 80여년 된 태극기 형태는 요즘과 크게 차이가 없지만 조국에 대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976년 36세의 나이로 김성식 회장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홍제동에서 방산시장으로 건너와 10만원짜리 방한칸을 구해 가정집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양철통에 구멍을 내서 버려진 나무로 불을 지펴 밥을 짓고 아내가 준비한 맛깔스런 반찬으로 손님을 끌었다. 그 당시 밥 한상은 300~400원 정도. 지금도 ‘단군나라’라는 가정집 식당을 운영해 오고 있다.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한 그의 할머니는 보부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부친 김 선생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김 회장의 부친 김 선생이 독립 운동을 할 당시 할머니께서 “아버지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나간 것이니 아버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또 “순간의 어려움을 참을 수 있는 의지력이 없으면 세상에 나가서는 아무일도 못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올해는 김성식 회장이 1978년 4월에 새마을 지도자로 위촉돼 활동한지 30년째 되는 해다.
그는 “새마을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보니 아내의 식당 일을 많이 못 도와 줬다”면서 “오죽하면 동네사람들이 미쳤다고 까지 했겠냐”며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사고 다발지역이었던 방산시장과 중부시장 사이 건널목에서 지역 주민들과 상인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12년 동안 인간신호등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는지 지나가던 장관이 누군지 확인하라는 지시로 인해 표창상신도 하지 않았는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 했다.
김 회장은 1979년부터 14년 동안 꿩을 남산자락에 방생했다. 그는 “그 당시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서 매달 50Kg사료 50포를 사들였다”고 말했다.
특히 그가 70평생을 살아오면서 전력투구를 다했던 순간은 중구재활용협의회장을 15년 동안 역임하면서다.
아시안게임(1986), 올림픽(1988) 개최 시기 무렵에는 을지로에 화분 700개를 3단으로 세워 아름다운 거리로 조성했다. 이러한 환경정비의 노력으로 자랑스런 서울 시민상은 물론 97년에는 재활용부문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표로 통상산업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 고아원, 재생원등을 방문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5년 동안 을지로 노인 600명을 대상으로 경로잔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 어렵게 살아봤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김 회장은 새마을중구협의회 부회장을 수년 동안 역임했으며, 현재 중구 새마을 친목회 회장, 중구 국학기공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자신을 위해, 사회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독립 유공자로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한 그의 부친을 생각하면 마음 한쪽이 아린다고.
그는 오직 나라 일만을 걱정하고 나라에 충성한 아버지의 애국심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다. 설사 아버지가 원하지 않더라도 다만 자식이 살아있기에 아버지의 혼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 이름을 팔아서 잘되려고 하지말고 나보다 더 국가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부친의 말씀때문에 조용히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유품 중에는 그 당시 독립 운동가들의 민족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수첩 ‘천부경’이 존재한다. 그의 부친이 체포되기 전후에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5월 ‘천부경’ 수첩, 김구 선생에게 받은 휘호 사본 등 독립 운동 관련 자료들을 국학원에 기증하기도 했다.
“유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올바른 역사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는 그의 모습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