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식 단군나라 대표.
/ 2016. 8. 24
봉사활동 38년, 12년째 어르신들에 경로잔치 열어
"내 이름을 팔아서 잘 되려고 하지 말고
나보다 더 국가에 필요한 사람이 되거라"
중구 주교동에서 음식점인 '단군나라'를 운영하는 김성식(82) 대표의 보물 1호는 80여년 된 태극기다. 김 대표의 아버지인 고 김정규(호적이름) 선생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하던 것이다.
전북 순창군 동계 출신인 김정규 선생은 광주고보(현 광주일고)에 입학하자마자 1929년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일본군의 눈을 피해 백범 김구 선생이 있는 상해임시정부와 용정을 오가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백범은 그에게 김정로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철혈남아'라 부르면서 윤봉길 의사에 이어 나라를 떠받칠 인재라며 무척 아꼈었다고 한다.
1935년에는 밀명을 받고 회당 손일민 선생과 임정을 오가며 전주 건지산(현 전북대 자리)에 아지트 건지사라는 절을 세우고 동지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펼쳤다. 회당은 건지사 낙성식 기념으로 김정규 동지를 진암 김정두라는 이름으로 하사했다. 그는 건지사에서 고종황제의 위패를 수년 동안 모시고 있었다. 1973년 전북향교재단에서 발행한 전북 원우록에 고종황제위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80여년 된 태극기는 김 선생이 이때 사용하던 태극기로 백범 김구선생께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에게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는 상징이었죠. 이 태극기 형태는 80년이 지났어도 요즘과 크게 차이가 없지만 조국에 대한 깊은 마음이 담겨 있죠."
김 선생은 43년 주민의 밀고로 전주교도소에 투옥된다. 김 선생의 아버지와 큰 형은 1년여 만에 풀려났으나 그는 158일 동안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뒤늦은 재판에서 1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형기를 마치기 전에 해방을 맞았다.
김 선생은 귀국한 백범을 보필하면서 해방된 조국을 위해 정치를 하기로 마음먹고 전국 순창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45세가 되던 해 전주에서 심장마비로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그 후 김 대표는 88년 부친을 대신해 광주일고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이런 아버지를 김 대표는 할머니를 따라 7살 때 전주교도소에서 처음 봤다.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한 그의 할머니는 보부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김 선생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오죽했으면 김 대표에게 "아버지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어 나간 것이니 아버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라"라고 할 정도였다.
해방 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한 김 대표는 9살 무렵 아버지가 모시던 백범을 자주 보게 됐다. 그때마다 백범은 '김동지 새끼야?' 하며 귀여워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고 국회의원까지 했다지만 실질적인 가장은 장남인 김 대표의 몫이었다. 동생 4명을 포함해 가족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주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 대표는 1976년 36세 나이로 홍제동에서 중구 방산시장으로 건너와 10만원짜리 방 한 칸을 구해 가정집 식당을 운영했다. 지금은 흔하지만 그 당시에 가정식 백반을 파는 집은 김 대표 식당이 처음일 정도로 독특한 음식점이었다.
양철통에 구멍을 내서 버려진 나무로 불을 지펴 지은 밥과 손맛이 좋았던 아내가 만든 맛깔스런 반찬을 내었는데 인근 전통시장 상인들이 즐겨 찾으면서 식당은 번성했다.
그때 김 대표는 78년부터 새마을지도자 활동을 시작하며, 자원봉사에 눈뜨게 된다.
당시 사고 다발 지역으로 유명했던 을지로 방산시장과 중부시장 사이 건널목에서 84년부터 아침마다 깃대를 들고 인간신호등 역할을 했다. 무려 12년 8개월간 계속했고, 김 대표 덕분에 상인들과 주민들은 안전하게 건널목을 건널 수 있었다.
"당시 차를 타고 지나가던 한 장관이 저를 신기하게 봤나 봐요. 누군지 확인하라고 지시해 얼떨결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어요."
김 대표는 2009년 10월부터 매달 마지막 수요일마다 형편이 어렵거나 혼자 사는 어르신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틈나는 대로 아내와 고아원, 재생원 등도 방문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2004년부터 5년 동안 자비를 들여 을지로동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79년부터 을지로동 자율방범대 초대 대장을 맡고서는 을지경로당에 매년 빠짐없이 쌀과 생필품을 지원했다. 자율방범대 고문으로 물러난 후에도 후배 대원들이 그의 좋은 뜻을 받들어 37년째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렵게 살아봤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지요. 그래서 어버이를 섬기듯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마음, 충효사상이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나만의 사회운동이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했다면 꾸준히 할 수 없었을 것이에요."
지금까지 38년째 새마을지도자 활동을 하는 열혈 자원봉사자이지만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부친을 생각하면 한쪽 마음이 아린다.
"내 이름을 팔아서 잘 되려고 하지 말고 나보다 더 국가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부친의 말씀 때문에 봉사를 하며 열심히 살아 왔죠."
그런데 이젠 오직 나라 일만을 걱정하고 나라에 충성한 부친의 애국심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뿐이다. 그래서 가게 이름도 14년 전에 '단군나라'로 바꿨다.
2008년에는 부친의 유품이자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천부경' 수첩과 백범에게 받은 휘호 사본 등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국학원에 기증하기도 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던 것은 아버지 같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아버지가 독립운동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후손들에게 아버지가 품었던 나라를 위한 마음을 알리는 게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해요. 나 역시 좋은 일 하면서 사회에 필요했던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도록 열심히 봉사할 계획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