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명동대성당.
/ 2014. 8.20
천주교회의 발상지며 심장인 '명동성당'
서소문공원에 순교자 '현양탑' 성지 상징
한국의 최초 고딕식 '약현성당' 사적지정
지난 14일 4박5일 일정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15일, 성(聖)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가 있는 충남 당진의 솔뫼성지 방문을 시작으로 16일에는 우리나라 최대 순교성지인 서소문공원을 참배한 뒤 광화문광장에서 시복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일정 마지막 날인 18일 오전에는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봉헌했다. 이날 교황은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에 따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통해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순례길과 중구 순교유적지를 찾아봤다.
◆ 광희문
광희문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서울 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다. 1711년에 개축됐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됐다. 그 후 6.25 전쟁으로 파괴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을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을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본래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하던 곳으로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속칭 남소문이라고도 한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 거부함으로써 순교해 광희문을 통해 시신으로 나오게 된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 명동대성당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종현(현 명동성당이 자리한 언덕의 옛 이름)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건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과 같은 곳이다. 1898년에 지어진 이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음을 상징하는 장소로,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다.
폭 29m, 길이 67.7m, 높이 22.5m 규모의 건물로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코스트(Coste,Eugene Jean Georges) 신부가 설계하고, 한강통연화소에서 생산한 벽돌로 지어졌다. 십자가를 제외한 종탑 높이가 47.25m에 이르며 바닥면적은 1천399㎡에 달한다. 국내의 유일한 순수 고딕양식 건물로서 원래 고딕양식은 돌로 지어 그 정교함을 잘 드러내지만 이 건물은 적색과 회색의 이형(異形)벽돌을 사용해 세부 곳곳에 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다.
지하 소성당 묘역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설계 때부터 계획된 시설로서 각지에서 발굴된 순교자들의 유해가 1900년부터 이곳으로 옮겨져 안치됐다. 명동대성당의 지하에는 순교 성인 5명과 순교자 4명 등 모두 9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김범우와 이벽의 집 터
김범우의 집은 1784년 말 신앙 집회가 열리던 곳으로, 김범우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당시 이곳에서 집회를 열었던 이들을 '명례방 공동체'라고 한다. 1785년 봄, 모임이 발각돼 공동체는 와해됐고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김범우는 충북 단양으로 유배된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1786년 선종했다.
한편, 북경에서 한국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 베드로는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신도들에게 첫 세례식을 거행했다. 이벽은 '세례자 요환', 정약용은 '사도 요한', 권일신은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이었다.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평신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한국 천주교회 창립터, 정조 8년(1784년) 겨울, 이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표지석을 세웠다. 정확한 고증에 따라 표지석의 위치는 향후 건너편인 수표교 남쪽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 서소문 역사공원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지였다. 창업 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처형했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었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됐다. 서소문을 통해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운반했는데, 시장이 있어 많은 사람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었다.
서소문 밖 형장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안으로 들어온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초기 한국교회의 대표적 평신도 지도자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최창현 요한, 강완숙 골룸바 등이 순교의 피를 흘린 때부터다.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도 바로 이곳에서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月落在天水上池盡)'라며 신앙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 외에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1984년 한국 천주교사에는 103위 순교 성인의 탄생이라는 세계 교회사상 드문 사건이 일어났다.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 성녀와 함께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곳이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다. 44명의 순교 성인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현양탑 앞은 성인들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방문하는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 중구에서는 지난 2011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시와 함께 한국 최대 순교성지인 서소문공원을 순교의 의미를 담은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6월 27일 공모를 통해 'en-city-engraving the park'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고 2017년 9월까지 완공할 예정이다.
현재 서소문공원에는 천주교 순교자의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1984년 세웠던 기존 탑이 1997년 서소문 공원정비로 헐리고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1999년 다시 현재 있는 탑을 세웠다고 한다.
탑 기단 위는 유리로 막아 물이 흐르게 했는데 이는 박해와 죽음의 상징인 칼과 생명의 상징인 물을 대비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높이 15m의 주탑과 13m의 좌우 대칭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3개의 탑은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 형틀인 '칼'을 형상화한 것으로 3개의 탑은 죽음과 박해를 상징하며, 주탑과 좌우탑 윗부분의 원형 형틀에서 흘러내리는 7개의 금빛 선은 순교를 통한 하느님의 은혜인 7성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현양탑 아래 분수에 잠긴 수천 개의 조약돌은 이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익명의 순교자를 상징하고, '칼'의 형상이 죽음을 상징한다면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물속에 비친 탑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한 생명의 이미지를 극대화 한 것이다.
주탑을 중심으로 오른쪽 탑은 44위 성인들의 명단을, 왼쪽 탑은 54위 순교자 명단(27위 하느님의 종 포함)을 기록해 이곳의 역사를 현장화 했다. 순교자의 제일 앞에 다산 정약용의 3째 형인 장약종이 있으며, 매형으로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 정약용의 조카이며 정약종의 아들인 정철상 등이 등재돼 있다.
◆ 중림동 약현성당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관할하는 중림동 약현성당은 1891년 11월 9일 명동 본당에서 분리 설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이다. 규모는 명동대성당보다 작지만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한국 최초의 고딕식 교회이다. 당시에는 건축기술과 재정이 부족해 로마네스크 약식과 고딕 양식을 절충해서 성당의 기본 공간과 형태를 간소하게 갖춘 채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성당 건물로는 드물게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곳이다. 성당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에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4대 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 신심서적 등이 있으며 특히 서소문 순교자인 강완순의 가계도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류도 전시하고 있다.
◆ 천주교의 전례와 다산 정약용
대한민국 천주교의 역사는 1784년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매형인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해 처남이자 정약용의 바로 윗형인 정약종(1760~1801)에게 세례를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정약용은 진산(지금의 금산)에 거주하는 외사촌 윤지충(고산 윤선도의 후손)에게 천주교를 전하고, 윤지충은 정조 15년(1791) 어머니가 숨지자 외사촌형 권상연과 상의해 종래의 관습대로 상복을 입고 통곡하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윤지충은 패륜 무도한 불효자로 낙인 찍혀 권상연과 함께 전주 풍남문(남문) 밖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됐는데 윤지충과 권상연은 최초의 순교자라고 하며 이 사건을 진산사건(1791, 신해박해)이라 한다.
정약용의 4형제(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는 모두 천주교 신자로 신유박해(1801)를 거치면서 정약전은 15년 동안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자산어보'를 집필했고, 정약용도 18년간 강진에 유배돼 많은 서적을 남겼다.
1786년 세례를 받은 정약종은 중국인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를 도우면서 신학서인 주교교리를 쓰고 한국 최초의 평신도단체 회장을 맡았으며,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고 두달 뒤 장남 정철상도 같은 장소에서 순교했다.
정약종이 순교한 38년 뒤인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부인 유씨와 또 다른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가 순교했는데 이들은 1984년 103위 성인품에 올랐다고 한다.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에 우리나라는 국가와 사회의 이념적 근본을 유교에 두고 있었다. 유교 사상과 그 실천은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의 바탕이었다. 따라서 유교에 회의를 품는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실학파 학자들은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적과 함께 새로운 종교, 천주교의 가르침에 빠져 들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느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이며 자매라는 가르침은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라는 엄격한 신분 차별이 있던 사회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조강구 기자>
◆ 천주교의 성장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교 사상에 젖어 있던 당시의 지배층은 천주교 신자들을 동양 윤리의 이단자이며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아 온갖 박해를 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년 동안 네 번에 걸친 커다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교사 영입과 성직자 배출을 위해 힘쓰던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1845년 김대건(안드레아)이 중국 상하이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최초의 조선인 사제를 맞게 됐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귀국한 지 1년도 채 안 된 이듬해에 체포돼 순교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예수의 기쁜 소식을 우리 민족과 함께 나누기 위해 혹독한 박해를 견디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배교(背敎)하겠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단란했던 가정, 잃었던 명예와 가산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의 사랑을 드러내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던 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이미 103명은 전 세계의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 공경하는 성인이 됐다.
오늘날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이런 모습을 이어 가고 있다. 직접적인 복음 선교 활동은 물론이려니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활동, 사회 정의 수호와 인권 옹호 활동 등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드러내고, 그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은 370만 명이라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봉사하고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