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고 / 장충동 안 경 춘

"우리는 마지막 실향민이다"

오는 6일이면 현충일이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과 순국선열들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날을 6월 6일로 정했다.

 

해마다 현충일이 다가오면 이 시대의 마지막 실향민으로서 멀지 않은 지역에 고향을 두고도 가지 못하는 애끊는 심정을 가눌 길이 없다. 지난 5월 11일에는 중구실향민 가족 80여 명이 강화도 평화전망대를 찾아 망향제를 올렸다. 이는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서 매년 봄, 가을에 열고 있다. 10월에는 이북 부모님들의 시제를 지내고 있다.

 

내가 살던 고향은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리현리 초도다.

 

현재 초도는 북한군 주요군기지로 활용하면서 비행장, 잠수기지 등 육해공군 3천 여명이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북한 김정은이 초도를 찾아 군사기지를 시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초도는 38선 이북지역에서 둘째가는 섬으로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리현리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은 31.4㎢에 달한다. 숙종재위(17년) 군작전 지휘부 및 그 관할처를 설치하여 예로부터 국방상 요충지였으며 첨사(僉使) 감목관(監牧官)이 배치되어 있던 곳이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알려진 유명한 초도는 전쟁당시 북한에서 밀려온 수많은 피난민을 후송, 구출했던 곳이다. 전쟁당시 B29 평양 진남포 등 폭격을 가할 당시 소련 비행기 F15기가 아군에 공중전을 하며 폭격을 가하자 그곳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비행기 동체는 화염에 쌓여 서해바다에 추락하고 아군의 조종사들은 초도섬에 낙하하여 수많은 조종사를 구출한 곳이 초도다.

 

1950년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퇴각하는 공산군을 추격,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11월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다시 확대되면서 계속 밀려 내려왔다.

 

서울에 환도했던 정부가 다시 부산까지 피난했다. 이것이 1·4후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찾아를 봤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1·4이후 나홀로 왔다"로 시작하는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는 6·25가 낳은 피난민들의 가요다. 이 노래는 고향을 등지고 마지막 전선까지 쫓겨온 피난민들의 애절한 절규였다.

 

전쟁당시 피난길은 동해와 서해로 나누어 졌다. 동해는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1950년 12월 21일과 23일 1만4천여 명이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서해는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역 사람들이 피난했던 지역으로 초도, 초도에서 백령도, 백령도에서 인천, 인천에서 군산 안면도로 등으로 피난했다.

 

이북5도 중 초도섬 때문에 서해쪽으로 피난민이 3만5천여명이 피난왔다고 하며, 특히 황해도 피난민이 아직도 300만 명이 생존해 있다.

 

북한 잔여 피난민들은 1·4후퇴로 평양 진남포 안악, 재령, 황해도 전 지역에서 피난처인 초도섬을 찾아 수만명이 목선을 타고 집결하게 됐다.

 

당시 치안대(민사처) 미군 해병대 유격대가 주둔하고 있어 미군의 도움과 치안대 활동으로 수많은 피난민을 인천, 군산, 목포, 무안 등으로 후송했다.

 

치안대 민사처 가족 1천800여명은 초도에서 미군의 엘에스티 배를 타고 백령도 진촌리에 도착 1개월 동안 생활하다가 일부는 백령도에 남고, 일부는 다시 미군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목포와 진도까지 피난했다.

 

진도군 의신면 피난민 수용소에서 살길을 찾아 일부는 서울과 인천, 안면도, 용유도, 무안 등지로 이사를 하였고, 나머지 피난민은 수용소에서 2년여 동안 생활했다.

 

필자는 그 당시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에 간척지가 있어 밀가루 구호물자 등 우선 생활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농사를 짓고 살고 있다. 부모들은 거의 다 돌아가시고 남아있는 수는 150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고향을 영원히 잃게 된 우리들은 60여년의 긴 세월동안 아직도 고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마지막 실향민이 됐다.

 

1953년 6월 중순 인천 용유도 월앙리에서 유격대 해산과 동시 가족이 없는 대원들은 현역으로 다시 입대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가족과 함께 용유도에서 살게 했다. 따라서 현재 용유도에는 100여 명이 살고 있다.

 

1950년 6·25일 전쟁은 발발 이래 3년 1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북진통일을 학수고대하던 실향민들은 천추의 한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향민 부모님들을 다 돌아가시고 당시 실향민 2세인 10대는 벌써 고희(70)를 넘어 80을 바라보는 그 긴 세월, 다시 6·25를 맞이하면서 아직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 참을 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