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장충단 복원 학술토론회 주요내용

정권탈취 목적 치밀히 계획 명성황후 시해

김삼웅 전관장 "일본 정부는 공식사죄하고 배상해야"

 

김란기 원 장 "장충단은 파괴되고 신라호텔 들어서"

 

(사)역사복원국민운동본부(상임대표 송태경)는 지난 7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장충단 복원'이라는 주제의 학술토론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일제 천인공노의 명성황후 시해진상'을, 김란기 한국역사문화정책 연구원장이 '장충단의 기원과 변화과정'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이와 함께 성헌식 역사복원신문의 편집인이 사회를 맡은 가운데 문상모 시의원, 사종민 청계천문화관장, 강석현 한국독립유공자협회 부회장 등이 참석해 토론을 벌였다. <다음은 주제발표 주요내용>

 

◆ 일제 천인공노의 명성황후 시해진상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일제의 만행이 천 가지 만 가지가 아니지만, 명성황후의 시해와 시신 능욕은 세월이 가도 잊을 수 없는 천인공노의 배천(背天)이고 반인륜이다"

 

1894년 동학혁명으로 조선의 정국이 소연해지는 틈을 타서 내정에 개입하게 된 일본은 갑오경장에 관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거세하고자 공작에 나섰다.

 

이런 일본의 야심을 간파한 명성황후는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개화세력을 제거하려고 했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정계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명성황후는 친러정책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일본세력에 대항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는 본국의 지시에 좇아 명성황후의 척족 및 친러세력을 제고하고자 국내의 친일세력과 짜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을 저질렀다.

 

명성황후 시해 음모는 이노우에 공사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우라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친됐다.

 

고종은 침전인 건녕전에서 잠을 자다가 폭한들에게 연금됐으며, 폭한들은 고종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난폭하게 굴었고, 나중에 왕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 왕세자도 의관을 찢기는 등 난폭한 위해를 당했다. 폭한들은 왕세자의 코끝에 칼을 갖다 대고 마구 위협과 공갈을 서슴지 않았으며, 오카모도는 왕을 붙잡고 황후의 폐출을 요구하는 문서를 내밀며 서명하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고종은 갖은 위협에도 이를 거부했다. 또 한패의 폭한들은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에 난입, 10여 명의 궁녀들의 머리채를 끌며 왕비인가를 확인하고, 궁내부 대신 이경식이 달려와 폭한들을 제지하자 그에게 총을 쏘아 관통상을 입히고, 이어 칼로 오른쪽 어깨를 찍어 살해했다.

 

16세에 고종의 왕비로 책봉된 이후 대원군 집정 10년간 탁월한 지혜와 덕망으로써 왕실의 번영과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 대원군과 고종을 잘 모시고 왕실의 법도를 잘 지키면서 시종일관 반일정책으로 일관했던 명성황후는 일제에 의해 참살됐다.

 

일제 어용학자와 한국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된 붓 끝에 의해 마치 대원군의 정적이고 희대의 요부인 것처럼 그려진 명성황후는 사후 백년이 지나도록 그 원통함이 올바르게 위령되지 못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일제가 치밀하게 꾸민 작전에 따라 참혹하게 시해됐다. 죽음은 헛되지 않아서 '국모시해 보복'과 '국권수호'를 내걸고 궐기한 1차 의병전쟁의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혼령은 조선의 애국충혼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공식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장춘단의 기원과 변화과정 / 김란기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장

 

1900년(고종 37) 5월 31일 고종은 군의 통제와 조종을 위해 헌병대의 설치를 원수부(元帥府)에 지시한다. 특히 갑오년에 국가를 위해 전사한 '전망사졸(戰亡士卒)'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추모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에 따라 '장충단'에 처음 배향된 사람은 시대위장 홍계훈·영관(領官) 염도회·이경호를 주신으로 삼고, 대관 김홍제·이학승·이종구 등 장병들의 신위를 모셨다.

 

염도희, 이종구, 이학승은 갑오농민전쟁 과정에서 농민군을 토벌하다가 죽임을 당한 관군의 장교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은 갑오농민전쟁 당시에도 양호초토사로 농민군을 진압한 공로가 있었으며, 민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장충단 건립에 대한 고종의 지시에 원수부는 즉각 그 준비에 착수했다.

 

장충단에는 주요 건축물로 3층 기단 위 제단과 15칸의 건물로 이루어진 단사(壇祠), 장충단비, 그리고 1칸의 비각이 있었다. 부속 건물로는 6칸의 전사청, 17칸 반의 양위헌, 10칸의 장무당, 30칸의 요리정, 고직처, 3칸의 고사(庫舍), 사졸의 병사, 1칸의 측간(후에 4칸으로 개축)이 있었다. 기타 소나무 가지로 만들어진 홍여문, 대한제국기를 4면에 꽂도록 설치된 기주, 다리 2개(대량판교와 중판교), 가산등도 있었다.

 

이들 건축물 중에는 비각 등 주요 건축물은 제사 건축물과 같이 붉은색의 석간주 단청을 하고 화려한 단청은 하지 않았다. 또한 단사나 전사청 등은 3개 층의 석조 기단을 쌓는 등 권위 있는 형태를 취했다.

 

국가기념물인 만큼 대한제국기를 4면에 꽂도록 기주를 설치해 명실상부한 국립 현충원의 위용을 갖추었다. 홍여문(虹如門)과 함께 화원과 화계를 가꾸고 가산(假山)까지 조성, 그 규모나 존엄에 부족함이 없게 했다.

 

이렇게 세워진 장충단에서는 1901년 봄부터 제사가 치러졌다. 1901년 4월 22일 황성신문에는 장충단에서 초혼제가 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한편 1907년 6월 12일에는 장충단에서 진명부인회가 개회식을 가진다고 황성신문이 보도했는데, 각 고등관과 사회명인을 초청하였다고 했다. 진명부인회가 친일적인 단체이거나 장충단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의도로 개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장충단의 훼손과정

 

1900년대 후반이 되자 장충단은 공원화되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국권이 일제에 넘어 간 후 이토 히로부미는 장충단에서 원유회를 가진 바 있다.

 

이는 대한제국이 자신의 국립묘역을 건립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대한제국 군인들로 하여금 국가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에 대한 훼손행위를 감행한 것으로, 후에 대한제국의 국가묘역을 유원지공원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판단된다.

 

이러던 중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살해당한 후에도 장충단에서는 일본의 몰역사적인 행위가 이뤄졌다. 순종실록 3권. 1909년(융희 3년)11월 4일에 의하면 태자 태사(太子 太師) 문충공 이토 히로부미 공작의 국장일에 황족, 궁내관, 각 부의 관리 및 인민들이 함께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거행하였다고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일제가 한국인에 의한 이토의 사망으로 한국인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인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실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장충단은 폐사되고, 비신도 뽑아 버렸다. 3·1운동 직후 공원으로 조성하기 시작해 1920년대 초반부터는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 장충단공원이라 하여,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놀이터, 연못, 산책로, 광장, 교량 등의 시설을 설치했다.

 

일제는 이미 서 있던 상하이 사변 때 전사한 일본군의 동상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사당으로 보제사인 박문사 건립을 추진한다. 이때 박문사의 본당 후면에 있는 쿠리(庫裡) 건물은 경복궁의 선원전 및 부속건물을 해체하여 재사용한 것이고 입구의 정문은 옛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다 세웠다. 이어서 나중에 추가로 세운 종탑은 원구단의 석고각을 이축해 사용했다.

 

△해방 후 장충단의 변천

 

광복이 되자 박문사 건물은 동국대 기숙사 등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광복 전 장충단 공원은 일제가 1940년 3월 12일자로 고시한 공원 140개 중 제8호 공원으로, 광복 후 한국 정부(내무부)는 '장충공원'과 남산공원의 면적을 크게 확대했다. 종전의 면적이 각각 41만 8천m(박문사 제외), 34만 8천m였던 것을 각각 69만9천500m, 125만6천m로 확장한 것이다.

 

이후 1984년까지 각종 국가기관을 무분별하게 건축하고 민간인에게 불법 불하하면서 공원용지를 해제해 장충단공원은 29만 7천m2로 축소되었고, 근린공원인 체육공원으로서 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이 들어서서 역사적 흔적을 훼손하는 근원이 되고 있다.

 

현재 장충단은 파괴돼 없어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위락시설인 신라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현재 장충단공원에 있는 외로운 비석 하나뿐이다.

 

장충단 비는 1895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때 일본인을 물리치다 순사한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한 여러 장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00년에 세워진 사당 장충단의 내력을 새긴 비석이다.

 

비석은 원래 장충단 입구에 서 있었으나 장충단이 없어진 후 현 위치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