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한다. 안의사의 유언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당시, 안의사의 묘역이 성역화 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측에 의해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았으며, 매장된 위치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윤택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해서 아명을 "응칠"이라 하였으며, 독립운동 당시 이 아명을 사용하셨다고 한다. 훗날 조부께서 진중한 사람이 되라고 이름을 중근으로 하셨다고 한다. 부친의 영향으로 천주교 교리를 습득하여 집안 전체가 천주교 교인이 되었으며 안중근 의사도 돈독한 신앙심으로 전교활동 등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애국계몽교육사업에 헌신하였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을 당시는 서상돈과 협의하여 관서지부를 개설하여 34원 60전이라는 국채의연금을 출연하였으며, 부인 김아려와 두 제수씨에게도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을 나라 구하는 일에 보탤 것을 독려하여 안중근 의사의 집안 여자들은 패물들을 모두 의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미7조약에 이어 군대까지 해산되자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독립투쟁을 시작하여, 마침내1909년 침략원흉을 응징하였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우리나라는 근현대사는 아픔이 많다. 그 아픔을 다 이겨내고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그 바탕에는 안중근 의사처럼 일신의 안위보다 조국만을 생각하신 분들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 그분들에 대해서 당연시 하고 과거를 돌아보려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3월 26일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잠시라도 의사님의 숭고한 정신과 기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