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명동국립극장이 34년만에 복원돼 지난 5일 개관식을 가졌다.
1975년 말 대한투자금융에 매각된 지 34년, 1994년 복원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2003년 12월 문화관광부에서 다시 건물을 사들인지 5년만에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명동은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문화예술의 1번지였으며 명동예술극장은 명치좌(明治座)에서 시공관(市公館), 국립극장, 국립극장 분관 예술극장으로 이어지면서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오페라, 연극, 무용, 여성국극, 클래식 연주회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선보이던 곳이자 ‘명동백작’이라 불리던 작가 이봉구가 “우리나라 문화가 다 들어가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우리나라 공연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유치진과 이해랑 등 쟁쟁한 극작가와 연출가, 변기종, 김동원, 장민호, 강계식, 백성희, 김진규, 박노식, 최무룡, 허장강, 도금봉, 문정숙, 최은희, 황정순, 이낙훈, 김동훈, 박정자, 김금지 등 당대 스타들이 이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가수 현인이 ‘신라의 달밤’을 불렀던 곳이었으며 7세 꼬마가수 윤복희가 데뷔한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1973년 8월 26일 장충동으로 국립극장이 이전하면서 한국문화예술의 심장부로서 명동의 기능은 급속히 상실됐고 소비의 중심지, 번화한 쇼핑가로서의 모습만 남게 됐다. 이 때문에 명동예술극장의 개관은 단순히 옛 국립극장 건물의 복원이라는 의미를 넘어 명동으로 상징되던 한국예술 정신의 복원과 귀환라는 의미가 내재돼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옛 국립극장이 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 했다.
하지만 명동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복원을 추진한 지 15년만에 결실을 맺은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연예인들이 아닌 순수한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이다. 명동상가번영회 김장환 회장을 주축으로 중구청장과 당시 중구출신 국회의원등 모든 인맥을 동원하고 책임자들을 찾아 나섰다. 주변에서 왜 그렇게 뛰어다니는지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평생을 명동에서 살았다고 할 만큼 명동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의혹은 문제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기자와 만났을 때 이렇게 늦어지고 어려울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 했다. 이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뇌와 번뇌가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예총관계자들은 오히려 국립극장을 복원하려면 그 돈으로 예총회관을 건립해 달라고 항의하면서 쉽게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이 늦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제 개관된 명동예술극장은 단순히 옛 건물의 복원을 넘어 중·장년층에게는 여유와 낭만이 있던 추억의 공간으로, 젊은이들에게는 여유있는 도심 속 쉼터로, 명동의 새로운 명소로 거듭나게 하는 일은 이제 연극 관계자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