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구의 구전설화 ⑥버티고개 유래

- 남소문과 버티고개의 유래담 -

 

◇ 현재 남산타운 앞인 버티고개 전경.

 

 신당동 끝과 약수동이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를 버티고개라 한다.

 

 옛날 이 고개는 길이 좁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란 농담을 하였다. 옛날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하면서 도둑을 쫓았는데 그말이 변하여 번치(番峙), 버티, 버터 또는 한자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한성부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다니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서쪽의 무악과 떡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달래서 머무르게 하고, 또 남쪽에는 벌아령(伐兒嶺)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여 그 그 아이를 못 나가도록 막았다는 것으로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숙종조에 있어서 남인(南人)들의 개문론에 반대하여 서인(西人)측에서는 같은 음양학적논리에 입각한 재문불길론을 들고 나왔던 것인데 결국은 '개문불길'의 주장이 관철되어 문제의 남소문(南小門) 재개(再開)는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숙종조에서는 남소문이 폐색하였기 때문에 왕실에 여자가 많이 나고 남자가 적다는 논법(論法)과는 반대로 지금까지 구비로 전하여 오는 말에는 남소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시내에 여자의 음행(淫行)이 많아지기 때문에 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의 논거(論據)가 어디에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퍽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것으로 널리 알려지고 한화(閑話)거리가 되어오는 것으로 이것은 서울 지세의 동남방이 저하(低下)한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여 오는 일종의 전래적 관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남소문이 있는 산마루를 예전에는 '버틔고개'라 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버틔고개'의 '버틔'는 저 숙종실록(권49)26년 경인 11월조 안정기(安鼎基)의 상소 중에 보이는 "대소부아현간 유일폐문 시위남소문야(大小負兒峴間 有一閉門 是謂南小門也)"중의 '부아현(負兒峴)'의 원어(原語)가 아닌가 한다. 즉'부아'는 우리말의 광명을 의미하는 말 불, '부여'의 한문식 기사인 것으로서 인거(人居) 중심지에서 동남방에 있는 산 현(峴)이 흔히 '부아'로 쓰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남소문이 있던 고개의 우리말 지명 '버틔고개'도 역시 고개의 방위가 서울에서의 동남방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출산(日出山)' 또는 '광명현(光明峴)'을 의미해서 '버틔'라고 불리워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 '버틔'는 남산의 일명인 '열경산' 또는 '인경산'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자료제공 중구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