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일은 6·25전쟁에 대한 정전협정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날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체결된 정전협정은 UN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Clark) 대장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협정 문서에 서명함으로서 발효됐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1953년 7월 27일의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과 전투행위의 중지만을 합의했을 뿐이고, 전쟁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는 정치적 문제들은 뒤로 미루어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정치회담을 시작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10월 26일 판문점에서 외국군 철수문제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예비회담이 시작됐다. 그러나 회담은 참가국의 범위와 의제문제로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다 12월 12일 결렬됐다. 해를 넘겨 1954년 1월 10일 북한 외무상이 정치회의 재개문제와 관련한 성명을 발표해 양측 연락관 사이에 회의가 재개됐으나 그마저 1월 18일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고 1954년 4월 26일부터 우리나라와 한국전쟁에 참전한 15개국(남아공은 불참), 북한과 중국, 소련 등 전체 1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제네바 정치회담이 개최됐다. 제네바 회담에서는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문제와 외국군대 철수문제를 둘러싸고 유엔 측과 공산진영 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후 쌍방은 공방을 거듭했으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논의조차 진행시키지 못한 채, 6월 15일 양측 성명을 끝으로 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회담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통일방안도, 외국군의 철수도, 그리고 평화체제 구축도 무위로 돌아갔다. 이로써 한반도의 분단은 완전히 고착화됐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도약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G20정상회의, 핵안보정상회의 등을 개최하여 세계 속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만방에 널리 보여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확대되고 있는 한류열풍과 다가오는 평창 동계올림픽 등의 개최를 통해 정치, 경제 등을 넘어선 문화대국으로서의 자리매김도 기대해 볼 정도로 우리나라의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이 이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 도취되어 크나큰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연일 보도되는 북한의 김정은의 세력 확장 소식과 북핵으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 속에 우리들의 안보의식은 눈에 보이는 성과의 발전과는 다르게 하루하루 해이해져만 가는 현실 속에 있다
이러한 확고한 의식 확립을 위해선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을 통한 "같은 목소리"가 필요하며 서로서로 한 발자국씩 물러나줄 아는 겸양과 화합의 미덕이 필요하다.
56년 전 정전협정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안보의식은 이제 유령처럼 떠돌 뿐 우리의 보편타당한 가치로서의 위치마저 잃었다. 일제 치하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던 순국선열과 우리 강토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였던 호국영령의 유지는 사장되고 오직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기뻐할 뿐이다.
과거의 상처를 통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국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할 대한민국은 7월 27일 6·25전쟁 정전 협정일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되짚고 분단국가로서, 분단국가 안에서 살고 있는 국민으로서 갖춰야 할 보편타당한 가치로서의 안보의식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뿌리 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