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울문화사학회가 창립 25주년을 맞아 주최하고 중구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주관한 이 심포지엄에서는 이화여대 명예교수인 신형식 서울시사편찬위원장의 '역사적 도시에서 개발의 방향(서소문공원의 재개발에 즈음하여)'라는 주제의 기조 강연과 함께 △이원명 서울여대 교수는 '조선시대 서울 한양도성과 4소문(서소문을 중심으로)' △차기진 천주교 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은 '조선후기 천주교인 참수와 서소문'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의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와 서소문'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의 '조선말기 만초천 유역의 경관변화와 서소문 밖 순교성지의 위치비정' △조경진 서울대 교수의 '서소문 공원의 미래와 발전(서소문공원 계획 구상)'의 주제 발표를 했다.(다음은 발표 주요내용)
신형식 교수
"순교성지화로 서부지역 허브로 육성해야"
이원명 교수
"순성놀이 역사 스토리 콘텐츠 활성화해야"
차기진 실장
"서소문은 천주교인 처형장, 중요한 순교 성지"
조 광 교수
"서소문공원 성지 명소화하면 세계인들 주목"
최영준 교수
"서소문 성지 위치비정, 한국교회 관심사 부각"
조경진 교수
"순교성지화 조성 역사문화벨트로 개발 필요"
■ 역사적 도시에서 새로운 개발의 방향(서소문 공원의 재개발에 즈음하여)=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소문 공원을 유일한 성문공원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가톨릭 성지라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공원의 재개발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재개발이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전문위원회를 두고 그 방법을 논의하고, 다방면의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2011년)에 돈의문 복원의 타당성조사 및 기본계획이 추진되고 있어 기대를 갖게 하지만 해결돼야 할 문제가 너무 많고 복잡해 새로운 방법이 요구되는 만큼 현재 입장에서 가장 타당한 방법은 서소문공원의 재개발과 새로운 보완이라는 것이다. 공원이라는 휴식처에다 서소문이 갖는 역사성과 천주교 성지로서의 의미를 어떻게 조화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3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첫째로 서소문공원을 노숙자의 낮잠 자는 공간에서 벗어나 시민휴식공간으로 보다 새로운 운동기구와 놀이공간이 확대돼야 하고, 둘째, 역사성의 확보로 서소문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정리해서 시민들에게 알리고 동시에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구청단위의 홍보활동이 필요하고, 특히 서소문이 시신운반의 창구나 서대문의 보조자라는 의미를 떠나 현재 서대문의 복원이 어려운 시점에서 의(義)를 상징하는 서울의 서쪽창구로서 인(仁)을 상징하는 동대문과 함께 인간의 올바른 도리를 지켜주는 용기(정의)의 창구로서 서울을 지켜주는 수문장임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서소문공원이 순교를 위한 신성한 성지로 거듭날 때 새로운 명소로서 민족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탈바꿈된 서울역-서소문공원-서대문형무소(독립문공원)를 잇는 공원벨트를 조성해 서부지역의 허브로 육성할 때 서소문 공원의 위상은 부상될 것으로 평가했다.
■ 조선시대 서울 한양도성과 4소문(서소문을 중심으로)=이원명 서울여대 사학과 교수
서울 도성을 하루에 도는 순성놀이를 부활해 새로운 역사 스토리 내지 콘텐츠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서울한양도성 4소문과 순성놀이'에서는 그동안 4대문에 비해 소홀히 다룬 4소문의 변천과정과 훼손과 파괴에서 다시 복원대상으로 된 4소문 서소문은 그만큼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소문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에 스토리 콘텐츠를 추가해 세계 천주교 역사상 순례코스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서울 한양도성(서울성곽)'은 그 역사의 정체성과 함께 문화 및 사람이 있는 도성으로 각인될 때 서울의 문화유산에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수 있다고 했다.
서울은 크게 8개산이 이중으로 둘러쌓여 있다. 즉 외사산인 북한산, 용마산, 관악산, 덕양산이 큰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내사산인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이 감싸고 있다.
그 중 내사산을 연결한 것은 '서울 한양도성(서울성곽)'이다. 이 도성에는 동서남북의 4대문과 그 사이 4소문에 소문(小門)이 있어 모두 8개소의 성문과 문루가 축조됐다. 태조 5년(1396년) 도성축조를 마칠 때 대체적으로 성문과 문루가 만들어 졌다.
즉 4대문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과 4소문인 혜화문(동소문), 광희문(남서문), 소의문(서소문), 창의문(북소문)이다. 이 4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문을 잇는 성곽은 한양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였다. 따라서 이 성문들은 각각 그 담당하고 있는 역할을 가지고 있어 중시됐다고 했다.
■ 조선 후기 천주교인 참수와 서소문=차기진 천주교 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서울의 형장 중에서 당고개는 교형장과 참형장으로 자주 이용됐고 서소문 밖은 주로 참형장으로 이용됐으며, 노량사장의 훈련교장은 주로 효수형장으로 이용됐다.
노량사장의 효수형장은 고종 4년(1867) 훈련교장 이전과 함께 만천평으로 이전됐다. 능지처사는 군기시 앞길에서 행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보다는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한 사례가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 특별한 경우에는 혜민서 앞 거리, 당고개, 동작나루 건너편, 무교 앞길에서도 능지처사가 이루어졌다. 이 중에서 서소문 밖 형장은 태종 16년(1416) 이후 서울의 상징적인 형장으로, 참형이나 능지처사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이다.
조선후기에 와서 서소문 밖 형장은 천주교인들의 처형장으로 가장 많이 이용됐다. 기록상으로 이곳에서 처형된 천주교인들의 수는 신유박해 순교자 31명, 기해박해 순교자 41명, 병인박해 순교자 12명 등 모두 84명으로 확인됐는데, 그 중에서 한국 103위 성인은 44명이고,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돼 현재 시복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는 20명이며, 하느님의 종 선정 대상자에 올라 있는 경우는 2명이다.
특히 그들 중에는 박해기의 교회사에서 지도자로, 혹은 회장으로 활동한 경우가 많다. 한국 천주교에서 서소문 밖 형장을 가장 중요한 순교 터요 순례지(성지)로 꼽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서소문=조 광 고려대 명예교수
서소문은 세계 가톨릭교회 2000여년의 역사에서 장기간에 걸쳐서 가장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특별한 곳으로 기념관이나 추모시설이 이루어진다면 또 다른 서울의 명소로 세계인에게 주목받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2007년 현재 전세계 가톨릭 신자의 숫자는 11억1천500만명으로 이들은 매년 9월24일을 전후해 한국가톨릭의 순교자들을 공식적으로 기억하고 있고, 이 순교자들을 배출한 곳을 찾고자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의 역사전개 과정에서 이곳 서소문은 가톨릭신자들의 신앙으로 적셔진 곳이며, 전근대적 질곡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꿈을 품으며 최후를 마쳤던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소문밖 형장은 조선후기 천주교 신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인물가운데 44명이 성인으로 선포됐다. 이는 한국의 103명에 이르는 가톨릭 성인 가운데 거의 40%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곳 서소문밖에서 1801년에 참수된 29명 신자 가운데 21명의 특출한 인물들은 현재 순교자로서의 행적에 관한 조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성인으로 선언된다면 서소문은 세계 가톨릭 교회사에서 70여년에 걸쳐서 계속 순교자를 배출한 대표적인 지역으로 인식될 것이다.
더욱이 이곳에서는 정약종과 그의 자녀인 정철상, 정하상, 정정혜가 순교했다.
정약종의 부인 유세실리아도 옥사했다. 현재 정약종과 정철상에 대해서는 순교행적에 대한 교회차원의 조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들이 복자품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1839년의 박해과정에서 정약종의 아내인 유세실리아와 그들의 자녀인 정하상과 정정혜가 순교해 이미 성인으로 선포됐다.
따라서 서소문밖은 이들 5인 가족의 순교자를 기념하는 장소로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 조선말기 만초천 유역의 경관 변화와 순교성지의 위치변경=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
가톨릭교가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지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교계에서는 역사적 대사건이 발생했던 주요 사적지를 찾아 성역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의 유적지들이 성지로 확인됐다. 그러나 가장 일찍이 저명한 가톨릭교계의 지도자들 다수가 순교한 서소문 성지는 명확한 위치비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식민지시대 초부터 시행된 급격한 도시화를 그 원인의 하나로 볼 수 있지만 일상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이 생활화하지 못한 우리의 문화행태를 더 큰 문제로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근래 서소문 성지의 위치 비정문제는 한국 교회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는 바 어느 정도의 연구 성과도 축적됐다고 생각한다.
서소문 순교성지는 조선조 초기부터 행형장으로 사용해온 만초천변의 하천부지였다. 지대가 저습하므로 선초에는 취락도 들어서지 않아 형장으로 적합했다. 17세기말부터 서소문 밖 구릉지에 취락이 들어서면서 이를 배경으로 서소문 네거리에 신전이 설립됐다. 신전의 입지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행형장 일대는 공지로 남겨두었으며, 이 장소에서 19세기에 이미 100여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했다. 서소문 네거리는 본래 서소문 고개보다 약 15m정도 낮은 저지대였으나 수차에 걸친 도로확장 및 정비공사로 지대가 높아졌다. 즉 서소문 구릉에서 채취된 토석으로 네거리 일대의 저지대를 이축한 것이다. 네거리를 교차하는 의주대로와 양화대로의 폭도 전보다 2∼3배 확장돼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각종 자료를 종합해본 결과 서소문 순교성지는 서소문 네거리의 좌측 상단부에 속하는 삼각형 지구, 즉 미근동 267번지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
이 대지상에는 현대 임광빌딩과 폐쇄된 서소문 파출소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장소는 지금까지 서소문 순교성지로 인식돼온 서소문 공원으로부터 약 200m 북쪽인 서소문 고가도로변에 위치한다.
■ 서소문공원의 미래와 비전(서소문공원 계획 구상)=조경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로 여겨지는 서소문공원을 2015년 목표로 개발 예정인 서울역 국제회의시설 완공에 맞춰 리모델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 교수는 서소문공원이 숭례문 부근의 도시관광형 공원이지만 경의선 선로로 접근이 단절돼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 천주교 순교성지화 사업과 함께 도심 내 서울역 국제컨벤션센터 조성과 연계한 역사문화벨트의 결절점으로 개발하자고 주장했다.
공원 전면의 경의선 철로가 도심으로부터 접근을 단절시켰으므로 입체적 구조물을 설치해 의주로 변과 시청에서 걸어서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남측의 서울역과도 공중보행로를 설치, 서울역∼서소문공원∼시청에 이르는 녹도축을 설정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조 교수는 도시 여가인 걷기가 확산되면서 도심내 그린웨이나 역사문화벨트의 활용이 증대될 것으로 보고, 서소문공원이 경복궁∼덕수궁∼숭례문∼서울역∼서소문공원으로 이어지는 역사문화축의 종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서소문공원이 근대 역사문화가 결집된 정동에서 서소문 순교성지인 약현성당으로 이어지는 중간 기점이면서, 손기정체육공원이나 백범기념관이 효창공원으로 이어지는 역사문화공원 네트워크 일환으로 연계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 교수는 공간정체성 제고를 위해 서소문이 천주교 순교지라는 장소의 의미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공원 내 설치돼 있는 기존의 기념비, 동상과 환경 조형물들을 재배치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순교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현양탑에서 방문자들이 기도와 헌화 등을 할 수 있도록 제대 등 편의시설을 갖출 필요도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아울러 조 교수는 공원 운영에 민관 파트너쉽을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서울역 국제회의시설이 조성되면 전면 광장과 더불어 서소문공원의 쓰임새나 기능이 재편되는 만큼 민관 파트너십으로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제공해 24시간 살아있는 공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소문공원에서 향후 서울성곽 및 도성과 관련된 주제와 천주교 관련 역사교육 프로그램의 운영이 가능하고, 주변 역사문화 지역 답사 프로그램의 운영 거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