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재조명 학술대회 활발

‘임진왜란, 서울 그리고 이순신’ 주제로 집중토론

 

◇지난 12일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임진왜란, 서울 그리고 이순신’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지난 12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임진왜란, 서울 그리고 이순신’을 주제로 임진왜란의 역사적의미, 이순신 장군과 서울의 관련성, 이순신에 대한 재조명 등을 집중 토론한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가비없이 참여가능 했던 이번 학술대회는 이장희 전성균관대 교수의 ‘동아시아에서 임진왜란이 갖는 역사적 의미’ 기조발표를 시작으로 제1주제 임진왜란의 전개과정과 그 결과 (이상훈 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제2주제 임진왜란과 선,정릉 도굴사건(손승철 강원대교수), 제3주제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와 임진왜란 (박재광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제4주제 이순신론에 대한 역사학적 반성(정두희 서강대교수)에 대한 학술발표에 이어 강성문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김문자 상명대 명예교수, 이인섭 이순신연구소장, 오성 세종대교수 등의 지정토론이 있었다. 지정토론이 끝난 후에는 참여자 모두에게 토론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장희 전성균관대 교수는 기조발표에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일본은 풍신수길의 정권이 무너지고 德川幕府가 들어섰으며, 명나라에는 명, 청 교체를 가져왔다”면서 “그러나 전쟁터가 된 조선에서는 왕조의 교체는 고사하고 왕위마저 바뀌지 않았는데, 이는 그 원인을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이족(異族)의 침입을 통해 유교적 근왕정신이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때문이 아닌가 한다”며 임진왜란이 동아시아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밝혔다.

 

 이존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충무공 이순신은 중구 인현동2가 마른내골에서 태어나 아산과 서울을 오가면서 청년기를 보냈고, 서울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해 무장의 길로 들어서 민족을 구한 인물이다”며 “이번 이순신학술대회로 동아시아에서 임진왜란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서울에서의 피해상,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과 서울의 관련성 등이 재조명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의 주관으로 개최됐다.

 

 

■‘임진왜란, 서울 그리고 이순신’ 학술대회 주요내용

 

현실통찰로 역사학적 관심대상 돼야

 

◆ 이상훈 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16세기말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큰 전쟁

◆ 손승철 강원대학교 교수

정릉도굴 대마도 유천씨 조직적 개입 사건

 

◆ 박재광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연전연승은 군사전략가 이순신 지휘능력

◆ 정두희 서강대학교 교수

역사적 ㆍ 체계적 연구 거의 없는 실정

 

 지난 12일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주최로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임진왜란, 서울 그리고 이순신’ 학술대회에서는 이장희 전성균관대 교수의 ‘동아시아에서 임진왜란이 갖는 역사적의미’ 기조발표에 이어 제1주제 임진왜란의 전개과정과 그 결과(이상훈 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제2주제 임진왜란과 선,정릉 도굴사건(손승철 강원대교수), 제3주제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와 임진왜란 (박재광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제4주제 이순신론에 대한 역사학적 반성(정두희 서강대교수)에 대한 학술발표가 있었다. (다음은 주요 발표내용)

 

 ◈ 임진왜란의 전개과정과 그 결과=이상훈 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임진왜란은 조선시대사 시대 구분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는 동시에 그 자체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은 크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다. 그런데 실제 ‘임진란’에 해당하는 시기는 5년이나 되기 때문에 이를 한 번 더 나눌 수 있다. 이에 따라 전체적으로는 세시기로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시기는 다르지만 대체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때로부터 이듬해 1593년 4월 일본군이 남해의 연안으로 퇴각할 때까지를 임진왜란초전기로 보고, 강화협상이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는 1597년 2월에서 일본군의 퇴각으로 전쟁이 끝나는 1598년 11월까지를 정유재란기라 할 수 있다. 이 두 시기는 주로 전투가 이루어졌던 시기로 합하면 약 2년 9개월 정도 된다. 중간 시기인 강화회담기는 조선을 철저히 배제한 채 명과 일본이 강화협상을 벌이던 시기로 3년이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격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전쟁초기와 종전 무렵 전투가 집중돼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서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계속되는 급보가 전해오자 혼란의 양상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일반 백성은 백성대로 관리는 관리대로 궁실은 궁실대로 피란 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며, 한편으로는 이일과 신립 등과 함께 전선으로 투입될 징병으로 인해 소란했다. 일본군의 점령 아래에서 일부 백성들이 저들에게 협력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근교의 지역에서 의병이 조직되고 공공연히 서울 탈환작전이 획책되니 일본군은 백성들을 의심해 마구 학살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국왕을 포로로 잡거나 서울만 점령하면 조선 전체가 항복할 줄 알았으나 전국적으로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게다가 1년 이상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염병과 추위도 무서운 적으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 일본군은 조직적인 약탈을 시도하는데 그 중에는 성종릉과 중종릉의 도굴도 있어 국교재개협상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1년 만에 서울이 수복되기는 했으나, 완전 폐허 상태로 임금은 환도를 늦추었고, 굶주린 사람들의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환도 이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한때 피란이 움직임도 있었으나 이후 서울은 남은 터전 위에서 전쟁의 종식과 명원군의 지공에 힘을 기울여야 했으며, 한편으로 방어를 위해서는 멀리 충주의 조령과 여주 등지의 남한강 중상류에 수비 시설을 보강해 방비를 굳건히 하고자 했다.

 

 임진왜란은 16세기말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큰 전쟁이었다. 단순한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는 서양 과학, 종교, 제도 등도 내재돼 있는 가히 ‘세계대전’으로 부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됐다. 그럼에도 연구 성과는 특정한 분야에 한정돼 있는 형편이고, 침략의 당사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의 연구는 교묘한 해석을 곁들이며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려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은 현대사의 가장 큰 끝나지 않은 전쟁 6.25전쟁을 연상시키며, 유사한 점도 많다는 점에서 앞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거울로 삼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 임진왜란과 선,정릉 도굴사건=손승철 강원대학교 교수

 

 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조선 전기 왜인상경로를 이용해, 5월 3일 서울에 입성했고, 그로부터 4개월 후인 9월에 선, 정릉을 도굴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진 것은 7개월 후인 1593년 4월 9일이었고, 발견 당신 정릉의 시신은 불에 태워져 있었고, 선릉의 두 시신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조정에서는 10월 29일에 조선인 가담자 14명을 색출했지만 선릉의 두 시신의 행방을 알 수 없었고, 중종의 시신도 그 진위를 밝힐 수 없었다.

 

 선, 정릉을 도굴한 왜인에 관해서는 1604년 6월 대마도에 탐적사의 역관으로 파견됐던 박대근이 귤지정과의 대화를 통해, 대마도주 휘하에 있던 平調允 부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은 강화조건으로 장군국서와 범능적 박송을 요구했는데, 일본에선는 개찬 된 국서와 대마도에 있던 잡범 2명을 잡아 보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선, 정릉의 도굴은 일본 치략군 제1군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선봉을 맡았던 대마도주 平調允 부자와 조선인 가담자 14명에 의해 이루어졌고, 박송된 麻多化之의 공초문에 平調允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대마도주 가신이었던 유천씨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고증이 필요하다.

 

 한편 조선에서는 범능적의 박송가 처형을 통해 강화의 명분과 교섭의 주도권을 잡으려했으며, 일그러진 국체를 회복하는 등 조, 일 외교에서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치하면서, 임진왜란의 상흔을 달래어 갔다.

 

 ◈ 충무로 이순신의 생애와 임진왜란=박재광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이순신은 점차 기울어가는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서 무인의 자질을 갖추었지만, 집안사정이 타고난 무인적 기질과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가세가 기운 8살 이전에 아산으로 내려간 듯하다. 이후 이순신은 22살 이전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이즈음에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유성룡과 만나게 됐다. 순신은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22살 때까지 문인의 소양을 닦아야 했다. 이후 장인의 도움을 받아 무인의 길로 택했는데, 그 과정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결국 이를 극복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 결과 이순신은 문무를 겸전한 무인이 됐다.

 

 이순신은 함경동 동구비보 권관으로 부임한 후 전라좌수사가 되기까지 15년간 결코 평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직책과 근무지가 아홉 번이나 바뀌었으며, 때로는 상관의 미움과 모함을 받아 파직돼 백의종군도 했고, 여진족과 싸우다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묵묵히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해 마침내 상관과 조정으로부터 그 인격과 능력을 인정받게 돼 전라좌수사로 발탁될 수 있었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먼저 예하지역을 순시하며 기강을 바로잡았고, 전비를 갖추었으며, 전함을 새로 건조하는 등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 결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수많은 해전에서 연승하고 해상의 제해권을 확보해 일본군의 참선을 차단, 봉쇄하였고, 호남을 적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해를 통한 일본군의 수륙병진 공격 기도를 분쇄해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순신이 거둔 전과는 세계 해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우군인 명군이나 적국인 일본군조차도 그를 세계 최고의 군사전략가로 극찬하고, 그를 본받기를 희망하였다.

 

 임진왜란은 16세기 말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난 국제 전쟁이자 전후 국제질서를 변화시킨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은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기간 중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무기체계, 특히 함포와 거북선 덕분이라고 하겠지만, 특히 탁월한 군사전략가 이순신의 지휘능력이 그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16세기 말에 조선군이 거둔 해전의 승리와 관련해 당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발휘한 이순신의 리더십에서 그 승전의 진가를 재음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이순신론에 대한 역사학적 반성=정두희 서강대학교 교수

 이순신은 역사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항상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그 이미지가 만들어져 왔다. 때로는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서, 때로는 민족독립의 상징적 존재로서, 심지어는 민족의 태양으로서 그에 대한 기억은 필요에 따라 항상 새롭게 만들어져 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제전쟁에서 한국이 승리할 수 있는 영감을 주는 기업경영자로서 추앙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역사적 성찰이 깊이 개입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난 수 백년 동안 이순신은 여러 모습으로 재인식되곤 했지만 항상 이 큰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된 존재로 해석된 적은 없었다. 이순신은 조선왕조 사회에서 결코 전군을 지휘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 못했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서나 삼도수군통제사로서나 이순신의 권한은 무척 제안돼 있었다. 그런 그가 명량해전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정유재란으로 다시 불붙은 전쟁의 흐름을 바꿔 놓은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은 치욕스러운일이 아니며, 삶과 죽음이 경각에 달린 전쟁터에서는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그의 죽음을 미화하고 전쟁의 성격을 모호한 채로 남겨두면서 그에 대한 논의는 역사를 떠나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전개돼 나가고 있다. 이순신의 수많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왕조는 패망의 직전까지 몰렸으며,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갔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볼 때 이 전쟁으로 일본의 의도가 달성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느 모로 보더라도 조선왕조가 이 전쟁을 이겼다고 미화할 여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전쟁에서 이순신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이 전쟁을 총체적으로 이끌어야 할 조선왕조의 지배체계 그 자체는 너무도 무능하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중국에 못지않은 강국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순신의 승전만을 이야기하는 동안 일본은 중국을 능가할 정도의 강국이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을 깨닫지 못한 조선왕조는 20세기에 들어 그 일본에 의해 멸망하고 한반도 전체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TV드라마가 앞장서고 온갖 대중매체들이 부추기는 이순신 열풍에 대해 아무런 메스가 가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역사학계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역사학자들은 그들만의 좁은 공간에서 빠져 나와 시야를 넓혀 가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변화무쌍한 현실을 통찰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항상 되짚어보는 지성적 자기성찰을 끊임없이 이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경계 선상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이순신을 만들어진 기억의 틀 속에서 살려내 역사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도 여기에 존재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