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탄신 460돌 - 중구인물, 충무공 이순신 세미나 주요내용

"중구 충무공 축제가 서울 핵심축제 돼야"

충무공 이순신 탄생 460주년을 맞아 중구에서는 '중구의 인물,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주제로 지난 4월26일 충무아트홀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다. 서울역사포럼 박경룡 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의 해양사상과 영토 수호(최두환 진해해군본부 충무수련원 연구실장) △이 충무공과 전라좌수영의 해상의병(조원래 순천대 사학과 교수) △이 충무공 생가 기념관 건립과 나라사랑 이어가기(이인섭 이순신 연구소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축제화 방안(중앙대 민속학과 교수)등을 각각 발표했다.(다음은 주제발표 주요내용)

 

● 최두환 해군본부 충무수련원 연구실장

"대마도는 우리땅…독도와 함께 다뤄야"

 

● 조원래 순천대 사학과 교수

"충무공 해상의병 모집 전투ㆍ병참 보충"

 

● 이인섭 이순신 연구소장

"충무공 생가ㆍ충무학당 건립 꼭 이루자"

 

● 김선풍 중앙대 민속학과 교수

"축제화 방안 마련 상품화 등 서둘러야"

 

■ 충무공 이순신의 해양사상과 영토 수호(최두환 해군본부 충무수련원 연구실장) 1596년 선조는 대마도를 다녀온 통신사 황신에게 "대마도는 본디 우리나라 땅인데 왜적(倭賊)에게 빼앗긴 것이다. 지금 그곳의 형세가 어떤가, 정벌한다면 쉽사리 빼앗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은 기록이 있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 분명하다. 따라서 독도는 대마도와 같이 다루어야 한다.

 

 최근 독도 영유권 문제로 반일감정과 독도사랑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 충무공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둔 지도자로 세계 해전사에서 전무후무한 26번의 전승방법과 국난의 현장이 생생히 기록된 난중일기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

 

 400년전 충무공의 해양전략 사상은 현대적 해군전략 못지 않아 현존함대 전략, 결전 전략, 길목차단 전략등은 세계 해군의 90%가 활용하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은 일찍이 충무공을 연구해서 청나라와 러시아 전쟁에서 승리했고 조선을 합병했음에도 정작 조선은 국론분열만 일삼고 나라를 빼앗기는 우를 범했다.

 

 충무공의 두드러진 사상은 견고한 거북선을 만들고 결전전략의 효과를 증대했다는 점이다.

 

 그는 옳은 일에는 목숨을 걸고라도 자신의 카리스마를 지켰으며 평상시에는 훌륭한 관리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리더였으며, 전시에는 오직 자신의 올바른 정보의 수집 판단, 급변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위기를 극복해내는 탁월한 능력의 리더로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싸움으로써 부하의 희생을 최소화했다.

 

 특히 7년 동안의 전쟁은 여느 영웅들처럼 국가에서 전폭적으로 지원, 후원, 보급된 것이 아니라 오직 충무공 스스로 현대적 경영 못지 않게 경영을 했다.

 

 충무공의 국가관과 우리 자신의 것을 비교해 보면 지금의 국난극복, 경제난국 타개에 일신할 수 있고 요즘의 파국적 사회현상도 바람직한 환경으로 바꿔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즉 개혁이나 변혁이란 것은 불합리한 것을 뜯어고치는 것인데, 충무공은 이상의 추구가 아니라 백성들과 부하들의 불사함을 미리 알아내 불평 불만 요인들을 제거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지지를 얻어 충무공의 성공적인 임무수행이 가능했다. 말하자면 충무공은 오직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백성들의 안위에 기초해서 평소엔 안녕과 행복을 추구했으며 외적의 침략에 방어하기 위해 유비무환 정신으로 정보 수집, 무기 및 전투진을 개발, 교육훈련을 통해 침략에 대비했다. 특히 조총을 본 따서 만든 정철총통은 조총보다 위력이 좋았다고 한다.

 

 충무공은 일본 침략군에 대해서는 한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고, 한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적기심으로 뭉치고, 만사불원일생 필사즉생의 용기와 결단으로 싸워 모두 승리했다. 그래서 우리는 국난이었던 임진왜란에서 전승했던 충무공의 역사와 리더십을 교훈삼고 본받아서 국내외적으로 모든 어려운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 이 충무공과 전라좌수영의 해상의병(조원래 순천대 사학과 교수) "이순신에 비하면 난 하사관 축에도 못낀다" 이 말은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하고 군신으로 추앙 받아온 일본의 해군제독 도오고오 헤이하치로가 한 유명한 말로 이순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솔직히 표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한 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1592년8월 전라좌수영 관내 각 고을에 공문을 띄워 사찰의 승려들과 민간의 한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의병모집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당시의 상황은 옥포에서의 서전 이후 한산도 해전에 이르기까지 전라좌수군이 일본군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해전에 자신감을 갖게 된 동시에 그 동안의 전력손실로 인해 그만한 병력충원이 필요했던 때이기도 했다.

 

 이때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관내 연해지역 각 고을에 직접 통문을 보내 해상의병활동에 참여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결과 1개월안에 순천 고흥 광양등지에서 400여명의 승려들이 참여했으며, 그밖에 진사 한량 교생(향교 유생)등 유생층에서도 의병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두 전라좌수사의 지휘통제하에 들어와 행동했으며 그 일부는 해안지역 요해처의 파수임무를 맡았고 다른 일부는 수군병력으로 충원되어 해상의 실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해상의병의 성군양상에 대한 당시의 사정은 장계문(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해상의병은 해상과 전라좌수영에서 가까운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전투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보좌하기도 하고, 때로는 군량보급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의병장 성응지나 의승장 삼혜 의능외에도 전라좌수영 관내에 거주했던 전직 또는 현직 관리들 중에는 자신들이 직접 전선을 마련해 의병활동에 참여한 예도 있었다. 즉 전만호 이원남이 의군을 인솔해 전선을 타고와 전라좌수군에 소속했고, 순천감목관 조정도 스스로 선박을 준비해 집안의 노예와 목동을 이끌고 부산포 해전에 자원 참전했다.

 

 또 본래 육장이었던 강진출신의 배경남도 신병으로 인해 향리에 있다가 이순신을 통해 해전에 자원해 왔던 인물이다. 그가 이순신에게 보낸 글속에서 "바닷가 강진에서 성장한 사람으로 선박에 다소 익숙하므로 수군에 소속해서 죽음으로써 토벌하기를 원한다"라고 한 것을 보면, 바다와 선박에 익숙한 연해민들은 육전보다 해전에 자원한 예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작된 해상의병의 활동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통제하에 그의 작전지위를 받으면서 수군병졸들과 더불어 직접 해상전투에 참전하기도 하고, 혹은 전라좌수영내 해안지역 방어임무를 수행하는등 전라좌수군의 전력 보강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해상의병의 활동의 하나는 전방에서 뛰어들어 실전을 수행하는 전투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전투를 지원하는 병참활동이었다.

 

 ■ 이 충무공 생가 기념관 건립과 나라사랑 이어가기(이인섭 이순신 연구소장) 중구 건천동 충무공 이순신의 생가는 현재 초동 명보극장터로 청년기까지 성장했다.

 

 그를 기리기 위한 충무로는 다른 곳에서 보는 충무와는 달라 그 뜻이 충무공 생가가 있기 때문임을 오늘 우리는 깊이 되새겨야 한다.

 

 충무공은 일생을 통해 5가지 큰 정신을 실천했다. 첫째, 제 힘으로 사는 정신으로 노력하고, 둘째, 정의를 목표로 삼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셋째, 국토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 넷째, 가족과 같이 동족을 사랑했으며, 다섯째, 새로운 길을 연구해서 뚫어가는 정신을 실천했다.

 

 이순신이 중국의 명인 제갈량과 비슷한 점은 제갈량은 54세로 오장원에서 세상을 마쳤고 시호가 충무이며, 충무공 역시 54세로 진중에서 세상을 마쳤고 시호가 충무다. 제갈량은 오자우언 싸움터에서 병을 얻어 죽었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장병들을 지휘하다 순국했다.

 

 이순신과 제갈량이 운명하던 날 하늘에서 똑같이 장성별이 떨어졌다. 제갈량은 출사표와 제갈양심서를 남겼고 충무공은 78회의 장계와 진중시 편지등을 남겼다.

 

 영국의 명장 넬슨제독과 비교해 보면 넬슨은 25세에 지중해 함대의 함대장이 되고 40세에 아브키르만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남작의 지위를 받고 3년뒤 발트해전에서 적군을 격파함으로써 자작으로 승진했다. 이순신은 40세에 전라좌수사가 되어 1차해전 옥포에서 승전함으로써 가선대부가 되고, 2차 해전 당포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자헌대부가 된 뒤 3차 한산대첩을 이룩함으로써 정헌대부까지 승진했다.

 

 이순신이 15세가 됐을 때 자기가 공부하는 사랑방에 한문학당을 열고 어릴 때 진치고 놀던 친구들을 모아 함께 공부하고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다. 전쟁놀이 할 때 대장이던 소년 이순신이 학당선생님으로 변해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따라서 요즘 독도문제와 역사왜곡문제로 한일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을 때 충무공 생가 기념관이나 순신학당을 건립해 청소년들에게 그의 생활 오대정신과 호국사상을 계승해 애국정신을 교육하면 나라사랑과 충효정신이 일어날 것이고 시민정신도 공감할 것이다.

 

 중구가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정신문화를 만들어 앞장서면 서울시가 그것을 표본으로 삼아 서울문화를 창조하고 충효윤리운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세계가 호응할 것이니 21세기를 향한 서울문화창조가 시급하다. 서울의 시민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충무공의 사상인 인류공영 충효윤리정신을 시민정신으로 해서 실천운동을 펼쳐야 한다.

 

 따라서 늦었지만 성웅 이충무공의 탄생지에 이충무공 생가기념관을 세워 그 사상과 행적을 시민들이 관람하고 연구하면서 체험으로 배우는 장소, 느끼고 공감하는 장소가 되도록 자료를 확충하고 수련해 나가면 청소년들과 시민의 생각이 바뀌고 미풍양속의 정신문화도 높아질 것이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축제화 방안(김선풍 중앙대 민속학과 교수) 오는 10월1일 청계천 복원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축제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축제와 상품은 그 자체가 전통지식자원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질적 접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여기에 축제위원회를 구성하면 금상첨화다. 율곡축제는 지방자치단체의 많은 예산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민관 일체의 협력이 필요하고 신명나는 축제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장소에서 이순신 장군의 축제를 벌여야 할까.

 

 충무공 축제를 위해서는 첫째, 장소문제를 고려할 때 대운동장 같은 관중이 없는 곳은 피해야 한다. 관중없는 축제나 공연은 하는 이나 즐기는 이 모두에게 피로감만 더해 준다. 둘째, 축제는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셋째, 경기도 여주, 이천 광주의 도자기 축제가 국제적으로 성공했듯이 독특한 상품이나 캐릭터를 소재로 한 축제로 발돋음 해야 한다.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관한 영화나 만화의 개발, 충무아트홀을 통한 대형 오페라나 사극, 춤판이나 공연을 개발해 중구의 이미지 하면 충무공 정신이 떠오르도록 세간에 각인시켜야 한다. 넷째, 난장트기는 필수적 행사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이 축제장에 몰려드는 이유는 먹거리, 볼거리, 살거리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축제의 성패는 달라진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다섯째, 축제가 개최될 때 소규모 박람회나 학술대회를 열어 지역 소개를 충분히 한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여섯째, 충무공을 기리는 축제는 가장 행렬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본다. 중구에 사는 보람을 느끼고, 내가 내 고장 민속축제를 체험하며, 중구에 산다는 자긍심을 한껏 갖도록 동별대항 충무공 이순신 장군 가장행렬대회를 한다면 큰 호응을 불러올 것이다. 일곱째, 축제와 놀이는 함수관계에 놓여있다. 단오하면 씨름이나 그네가 연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족의 위기를 극복한 성웅 이순신 장군의 축제에는 무술대회가 우선돼야 한다. 남산택견, 노들택견, 서울통씨름, 활쏘기 대회, 석전, 서울풍물, 서울산대놀이, 강강술래, 여원무등을 새로 개발하고 경연대회를 한다면 시류에 맞는 좋은 볼거리가 될 것이다. 여덟째, 축제의 제의성을 요구한다.

 

건천동 생가터에는 큰 표석과 제당을 설치하고 제향을 올리는 향사는 남산이나 한옥마을에 건립했으면 한다. 아홉째, 율곡 축제의 경우 출생지역인 강릉 오죽헌을 중심으로 한 축제가 파주보다 더 활성화되어 있듯 중구의 충무공 축제가 서울축제의 핵심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열 번째 축제판도 이론이 서야 한다.

 

율곡학회와 율곡연구원이 있듯 성웅 충무공을 연구할 수 있는 기관을 설치하고 학회지와 연구집을 꾸준히 발간해야 한다. 열한번째 축제일은 충무공이 탄생한 날이거나 아니면 중구민의 날로 잡으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