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눈물을 닦아주지는 못하더라도

김 삼 웅 성균관대학교수,전대한매일 주필

영국의 정치학자 헤롤드 러스키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역사는 보복한다"고 말했다.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를 막론하고 개혁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국가는 창업-경장-개혁-수성의 4단계를 거쳐 발전한다. 창업은 오히려 개혁보다 쉽다. 경장이나 개혁은 이미 형성된 기득권층의 도전으로 더욱 어렵다. 창업공신들이 당초의 철학과 개혁의지를 잃고 새로운 기득권 세력을 형성해 현상유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초기 왕자의 난과 수양대군의 쿠데타 등을 겪으면서도 왕성한 개혁의지로서 왕업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세종대왕에 이어 성종 대를 거치면서 건강한 문화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지도세력이 안일에 빠지면서 연산군의 폭정기를 거쳐 보수화로 굳어갔다.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가 제기되고 율곡의 변법경장(變法更張)이 주창됐지만 조정은 이미 썩은 수구세력에 장악되고 마침내 임진ㆍ정유왜란과 정묘ㆍ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가는 쑥대밭이 되었다.

 

 북벌론에 이어 올곧은 지식인들이 실학사상을 제시하면서 국정개혁을 도모하였지만 기득권 유지에 얼이 빠진 지도자들은 정쟁을 멈추지 않았다. 참다못해 민중들이 동학혁명으로 꿈틀거렸지만 지배층은 외세를 끌어들여 진압하고 말았다. 민중의 ‘꿈틀거림’은 홍경래란ㆍ진주민란ㆍ삼남민란ㆍ동학혁명으로 이어졌지만, 부패한 위정자들은 취생몽사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꿈틀거림' 이란 '꿈의 틀'을 말함이다. 희망과 이상을 기대하면서 움직이는 생명의 법칙이다. 그렇지만 위정자들은 민중의 마지막 꿈 마져도 폭력으로 또는 외세의 힘으로 짓밟았다. 그 결과 반세기 참담한 식민지 지배의 '역사단절'을 겪어야 했다. 개혁을 거부한 때문에 당한 역사의 보복인 셈이다. 기회는 다시 있었다. 해방후ㆍ4월혁명후ㆍ6월항쟁후, 그것도 아니면 50년 만에 이룩한 김대중정부의 수평적 정권교체기와 정치개혁을 담보로 집권한 노무현정권이 출범한 지금이다.

 

 개혁이 요구될 때에 개혁을 하지 않아서 엄청난 역사의 보복을 당하면서도,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개혁주체의 미숙과 강고한 수구기득집단의 도전을 혁파하지 못한 때문이다. 외세의 개입도 큰 책임이 따른다.

 

 기존의 틀을 바꾸고 새틀을 짜는 작업이 개혁이다. 혁명과 다른 것은 기존의 '틀'을 없애지 않고 고치거나 바꾼다는 점이다.

 

 우리 공동체를 이끄는 정치의 낡은 틀을 바꾸지 않고는 발전이 어렵다. 바뀔 때 바뀌지 않고 변할 때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번데기가 변하여 나비가 되고 올챙이가 변하여 개구리가 되듯이 모든 생명체는 변화를 통해 생체와 종족을 유지한다. 그렇지 못한 종(種)은 멸종되거나 퇴화하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인간사회와 역사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역사는 몇 차례 개혁이 요구될 때 이를 거부하여 정체-퇴행-망국-분단-전란에 이어 3대의 군사독재를 불러왔다.

 

 어느 시대나 수구세력이 개혁에 동참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가장 큰 이유다. 한국의 기득세력은 일제 36년에 이어 해방 후 반세기에 걸쳐 형성된 관계로 실로 막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주체는 정신적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유능한 인사들로 짜여서 상대적인 비교우위에 섬으로써 국민의 지지 속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길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김대중 정부는 초기부터 구시대 인사들을 중용하고 역사의식과 개혁의지가 모자라는 기능주의, 기회주의자들을 다수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개혁을 부실하게 만들고 개혁주체의 형성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도 유사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집권 초기의 황금같은 시간을 놓치고 있다.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개혁시스템 보다 대증요법일 뿐이다. 그때 그때 나타난 현상에 대응하면서 황금기간을 까먹고 있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인'인 국회의원은 그렇다고 공무원이나 직장인ㆍ농부ㆍ어민 등의 직업인과는 다르다. 그들에게는 언필칭 '국민의 대표'라는 막중한 사명이 부여된다. 단순히 자기의 이익이나 자당의 이익을 위해서 일 한다면 다른 직업인들과 다를 바 없다.

 

 인도 총리를 지낸 네루는 "국민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치의 덕목"이라 말했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실업자가 늘고 각종 범죄가 국민을 불안케 한다. 이혼율은 세계최고 수준이고 성범죄 역시 세계최고다. 국제투명성 기구(IT)가 47개국을 대상으로 한'글로벌 부패척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최우선 부패척결 분야로 정당과 정치인을 꼽았다.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빙점에 도달한 시점에서 더 이상 정치개혁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국민이 선택을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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