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신당동 성당 한정관 신부

광희문 성지 '순교 현양관 건립' 동참하자

/ 2014. 3. 12

 

현재 중구 광희2동에 자리잡고 있는 광희문은 1456년경에 세워진 성문으로 서울의 4소문 중의 하나인 남소문(南小門)의 또 다른 이름이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위치한 이 남소문에 광희문이라는 현판이 1719년에 걸렸고 따라서 그 이후로는 남소문 보다 광희문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광희문은 서울의 서소문과 함께 서울 도성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해 나갈 수 있는 문으로 지정돼 있었다. 그래서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고 또한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포도청이나 의금부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됐거나 옥사한 신자들의 시신도 이곳에다 버렸다. 예를 들면 1839년 기해박해 때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 1846년 병오박해 때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한 성녀우술임(수산나), 성녀 김임이(데레사), 성녀이간란(아가타), 성녀 정철염(카타리나)등 순교 성인들의 시신이 이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1867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송백돌(베드로)의 시신 역시 광희문 밖 성벽 밑에 묻혔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1866년, 1868년 등의 박해 때에도 순교한 적지 않은 신자들도 역시 바로 이곳에 내버려져 가족들이 찾아가지 않을 경우에는 순교자들은 이 광희문 근처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순교 성인들이나 무명 순교자들을 기념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가 되었고, 순교자들의 죽음과 주검을 통해 성화되었다.

 

이 성화된 땅에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순교 현양관을 마련해 순교자들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했던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소다. 이것이 바로 이곳 광희문 밖에 순교자들을 기릴 수 있는 순교 현양관을 설치해야 할 첫 번째 이유인 것이다.

 

오늘날의 순례자들은 한국전주교회에서 제시해 주는 순교성지들을 즐겨 찾지만 순교 당시의 상황을 체험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모든 순교 사적지는 원형이 철저히 파괴되어 있지만 광희문은 당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사와 순교의 교회사를 회상하기에 적합한 자리가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순교 현양관을 설치해야 할 두 번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광희문은 현재 서울시와 중구청이 정비를 마쳐 누구든지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비록 작은 규모라 해도 순교현양관이 세워진다면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순교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알려줄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이 될 것이다. 이 점이 이곳에 순교현양관이 세워져야 할 세 번째 이유가 된다.

 

현재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한국교회는 국내의 순교 사적지에 대한 순례를 신자들에게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이곳 광희문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현장에서 간단한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는 장소를 갈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곳에 사제가 상주하여 신자들에게 고해성사, 미사등을 집전하며 그들의 신앙상담에 응할 수 있다면 더 큰 영적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광희문 순교현양양관이 세워져야할 네 번째 이유가 있다.

 

서울대교구장이신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께서는 순교자 현양관과 순교자 영성의 생활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교구장님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로 이곳 광희문 성지에 순교현양관이 세워지도록 허락하셨으며, 광희문 순교현양관을 이용하는 우리 신앙공동체에 영적이익을 증대시키고, 천주교 순교자들의 존재와 순교영성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광희문 성지 순교 현양관 건립에 교우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와 성원을 간청한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