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거센 반대에도 주한 미국대사관 측은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터(구 경기여고 땅)에 15층 높이의 대사관을 짓겠다고 고집한다. 어째서 외세는 서울 한복판의 옛 왕궁터를 탐내는가. 몇해 러시아는 덕수궁 주변의 구 배제학당 자리에 대사관 건물을 신축하여 입주하고 석조전 뒷편에는 영국대사관이 자리한다. 그리고 정동 예원고 옆에 들어선 캐나다 대사관에 이어 새로 미국 대사관까지 짓게 되면 덕수궁 주위는 온통 외국인 타운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대한제국 시대 국권이 흔들릴 때 열강들에게 짓밟혔던 왕궁주변에 또 다시 거대한 미국 대사관이 들어서면 우리의 자존심은 심하게 상처받고 문화주권은 또 한번 심하게 짓밟히게 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6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 근정전 앞에 총독부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0년만인 1926년 1월 우람한 청사준공식을 가졌다. 조선왕조의 심장부를 정면에서 틀어막아 일제의 위세를 보이겠다는 책략이고 협박이었다.
일제가 하필이면 왕조의 정궁(正宮) 앞뜰에 총독부건물을 짓는 데는 그들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태조가 백두산에서 시작된 기맥의 숨결이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으로 흘러내려 삼각산을 거쳐 북악에서 커다란 매듭을 틀었다는 당대의 석학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학설을 좇아 이곳에 왕궁을 건설한 것은 다 아는 일이다.
일제는 조선인의 기를 죽이고 맥을 끊고자 조선정궁을 가리도록 하는 총독부건물을 짓는 한편 삼각산 백운대의 정수리 바위에 구멍을 뚫어 쇳물을 녹여붓고 쇠못을 처박기도 했었다.
저들은 조선인의 기를 죽이고 맥을 끊기 위해 백운대 뿐만 아니라 북한산 노적봉, 속리산 만장봉, 마니산, 구월산 등 전국 주요 산맥과 큰 바위에는 어김없이 이런 짓을 자행했다.
어찌보면 한갓 미신이거나 풍수도참설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저들의 의도하는 바는 너무나 분명하고 악의적이었다.
경복궁과 일제와의 악연은 뿌리가 깊다. 조선왕조 개국초에 지은 경복궁이 임진왜란때 불타서 사라지고 대원군이 집권하여 중건한 것을 50년 만에 일제가 근정전 앞에 총독부건물을 지으면서 국민과 왕궁을 차단시켰던 것이다. 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일(日)'자로 보이도록 설계하고 나중에 지은 경성부청사(현 서울시청)는 '본(本)'자를 상징하여 지었다. 조선통치의 상징적인 두 건물이 북악 방향에서부터 '니뽄(日本)'이라 읽힐 수 있도록 설계하고 그렇게 지은 것이다.
덕수궁은 경복궁만은 못하지만 조선왕궁의 하나임에는 어김이 없다. 임진왜란때 경복궁이 불타고 피난에서 서울로 돌아온 선조가 이곳을 거처로 사용하면서 경운궁으로 궁호가 붙은 이래 광해군이 여기서 즉위하는 등 궁궐로 사용되었다.
고종 말년에 조선왕조가 국제 열강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왕이 경운궁으로 옮기면서 파란만장한 한말의 역사와 망국사는 이곳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고종이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퇴위하고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면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태상왕이된 고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1907년). 외국 공관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이러한 한말 격동기의 일이다.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용산의 미군 기지를 이전하기로 하여 수백 년 동안 짓밟혀 온 민족의 자존심이 모처럼 회복되려는 시점에 덕수궁 터에 거대한 외국대사관이 들어선다면 이 또한 국민의 수치가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정부와 서울시 당국은 물론이려니와 중구 주민들도 이 문제에 대한 역사의식과 관심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주한 미국대사관 측이 한국인의 자존심과 고궁에 대한 인식을 헤아려서 대사관건립을 취소하는 일이다. 이것이 한미우호와 혈맹을 공고히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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