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잊어버렸어요. 노망이 들어서", "괜찮아요, 기억이 안 나도" 나는 말했다. 기묘한 일이었지만 어머니가 옛날 일을 기억해내려는 표정과 고개를 기울이거나 얼굴을 숙이며 무릎 위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모습에는 참회라도 강요하는 듯한 조심스러움과 측은함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옛날 일을 기억시킬 권리는 나에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86쪽)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치매 어머니에게 바친 절절한 사모곡.
'내 어머니의 연대기'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이노우에 야스시(1907∼1991)의 자전적 소설이다. 문예지 '군상'에 발표된 '꽃나무 아래에서' '달빛' '설면'을 엮어 1977년 발간됐다. 이번 번역본에는 죽음이라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묘지와 새우감자'가 추가됐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이 작품들에 대해 스스로 '수필도 소설도 아닌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라는 사실적 소재를 다루었기에 주로 허구를 통해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온 기존 소설과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노년을 응시하며 죽음과 인간사라는 보편적인 테마를 미시적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일본의 사소설 전통을 잇고 있다.
소설은 치매 노인이 있는 가족들이 겪게 되는 혼돈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억이 사라진, 여백과도 같은 공간에 서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이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된다. 작가는 '통곡하는 비통함만이 슬픔의 표출 방식은 아니듯 조용한 침묵과 담담한 시선으로 표출되는 아픔'을 말한다.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학고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