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고 / 이라크 파병문제와 임진왜란

김 삼 웅 성균관대교수,전대한매일 주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니까 40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런데 한 부문이 어쩌면 요즘의 상황과 저리도 닮았을까.

 

 1591년 3월 일본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조선의 조정에서는 서인의 황윤길을 정사로, 동인의 김성일을 부사로 삼아 일본의 정황을 탐지하는 '특별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이듬해 3월에 귀국한 시찰단의 의견은 정반대였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안광이 빛나고 담력이 있어 보인다고 침입가능성을 보고했다.

 

 이에 반해 부사 김성일은 일본이 침입할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쥐새끼눈과 같아서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때 서장관으로 동행하였던 허성은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하였고, 김성일을 수행하였던 황진은 김성일이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다고 분노하였다.

 

 시찰단의 상반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정파에 따라 서인층은 황윤길의 말을, 동인측은 김성일의 말을 쫓으면서 새로운 정쟁거리로 삼았다. 동서의 정쟁이 격심했던 상황이라 시찰단이 살피고 온 실체적 진실을 알아보기 보다는 자파의 사절을 비호하고 상대를 헐뜯기에 급급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당파싸움 끝에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으로 기울게 되어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단시켰다. 그리고 다시 정쟁으로 날밤을 지새울 때 1592년 4월 14일 30만 왜병이 병선 700여척에 나누어 타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날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임진, 정유재란 7년 동안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백성이 어육으로 짓밟힌 참담한 역사를 새삼 들먹일 지면은 없다.

 

 이라크에 대한 추가파병 여부를 결정짓기 위해 파견한 이라크 현지조사단의 정사라고 할 수 있는 단장 강대영 육군준장은 현지상황이 전반적으로 안정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군이 파병될 경우 주둔지역으로 꼽히고 있는 북부의 모슬 지역에서도 테러의 위험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에 반해 부사격인 민간인 전문가 자격으로 참가한 박건영가톨릭대 교수는 모슬지역의 경우 조사단이 미군 헬기와 차량으로 20분씩 시내를 살피고 현지인과도 거의 대화가 없었으며 미군의 안내에만 의존했다고 밝혔다. 종전이후 치안상태가 오히려 나빠졌다는 소식도 전하였다.

 

 누구의 말이 옳은가. 임진왜란 직전에는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정사와 부사가 당파적 이해관계로 상반된 주장을 하다가 결국 민족만대를 두고 씻지못할 참극을 불렀다.

 

 지금은 물론 그때와는 여러 가지로 정황이 다르다. 당시는 우리가 침략당하는 처지였지만 지금은 국군전투병을 파병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젊은이들을 전장에 내보내어 희생자가 생길지도 모르며 천문학적인 전비를 부담하게 된다. 참전하게 될 경우, 55개국 이슬람국가들과 척을 짓게 되고 자칫 국제사회로부터 분쟁만 생기면 총들고 싸움터에 나선다는 호전국가로 낙인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반대로 미국이 어려운 상태에서 이라크전의 늪에 빠져들고 있을 때 모른 체 하는 것이 과연 북핵문제 해결이나 한미혈맹의 관계로 보아 합당한 것인지,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그렇다면 파병이 국익인가 반대하는 것이 국익인가는 냉정한 분석과 검증을 통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그 일차적인 과제가 바로 현지조사단의 활동이다. 파병 요청을 받은 일본의 경우 이미 10여 차례에 걸쳐 조사단을 보내 조사 활동을 벌이면서도 신중한 모습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단 한 차례 조사단을 보내고 그나마 부실한 활동과 조사팀끼리도 '황윤길과 김성일' 식의 상반된 보고를 하고, 이것이 엉뚱한 쟁론으로 번지는 것은 전혀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 우매한 짓이다.

 

 이라크 전투병 파병문제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서 결정해야 한다. 국익과 국가이미지, 한미관계와 이슬람권과의 교역통상문제, 따르게 될지 모르는 희생자와 막대한 전비 등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판단을 하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전문인사들로 구성한 조사단을 몇 차례 더 파견하여 우선 현지사정부터 정확히 살피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위 특별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