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단 비
◆ 제국시대의 흔적 장충단 비
중구 장충동 2가 197에 있는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중구)로서 1969년9월18일 지정한 대한제국시대의 장충단에 서 있던 비가 있다.
장충단은 조선 고종 32년(1895)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인을 물리치다 순국한 홍계훈, 이경직 및 여러 신하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문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서 앞면에는 '장충단(奬忠檀)'이라는 비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쓴 글씨라고 하며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비문이 기록돼 있다.
광무 4년(1900) 고종의 명에 의해 장충단을 지을 때 비도 함께 세워 놓았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이 비를 뽑아 버렸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시설들을 설치해 '장충단 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광복 후 일제가 세웠던 건물을 모두 헐면서, 비도 다시 찾아 세우게 됐으며,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서울시유형 문화재 제18호) 서쪽에 옮겨 세웠다.
◆ 유정 사명대사 상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해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해 선 종수사찰(禪 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됐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으며,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돼 의승병 2천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해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했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됐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해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고, 전란 때 잡혀간 3천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했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했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했으며, 제자들이 다비해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 일성 이준 열사 상
이준 열사는 1859년 12월 18일(음)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선친 이병권, 자당 청주 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해 3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모두 작고해 이준은 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했다.
열사는 17세 때 고향을 떠나 상경, 대원군을 만나게 됐으며, 1884년 열사의 나이 26세 때 함경도시(咸鏡道試)에 장원급제 했다. 1888년 30세 때 고향 북청에 인재양성을 위해 경학원을 설립했는데, 경학원은 후에 북청공립농업학교가 됐다. 1896년 서재필(32세), 박영효(35세), 이상재(46세) 등과 함께 나라와 겨레를 좀먹는 악질적 탐관오리를 규탄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에 맞서 격렬한 저항운동을 펴 나갔는데, 이 운동은 우리나라 민주시민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1896년 '독립협회' 평의장 직을 맡아 서재필, 이승만(22세)과 함께 독립신문 발간 및 독립협회를 '만민공동회'로 개칭하고, 배일(排日)저항운동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비정(秕政) 탄핵 가두연설로 이승만, 이동녕(26세) 등 17인과 함께 투옥 당했다.
1902년 44세 때 민영환(42세), 이상재(53세), 이용익(45세), 이동휘(30세) 등과 함께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46세 때 일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간권을 막기 위해 '대한보안회'를 조직, 민중운동을 전개했고, 대한보안회가 칙령으로 해산 당하자 이를 '대한협동회'로 다시 만들어 회장직을 맡아 집요한 투쟁을 전개, 결국 일본공사로부터 황지문권을 탈환, 황제께 드리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1905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영애 '아리스'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수동맹'을 제창했으며, 같은 해 민영환과 상의한 후 을사보호조약 반대를 위한 국제적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갔다가 민영환이 순국 자결했다는 연락을 받고 통곡하면서 귀국했다.
1906년 48세 때 '만국청년회' 회장에 취임해 국제친선운동을 전개하고, 정부에 '國政 구폐 진언서'를 제출했으며, 같은 해에 '국민교육회' 회장에 재선돼 이동휘(34세), 이갑(30세), 안창호(27세), 유근(46세), 유정수(51세), 유승겸(31세), 홍재기(34세) 등과 국민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보광학교'를 설립하고,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보광학교의 야학제도와 같은 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됐다.
같은 해인 1906년에 '법안연구회' 회장에 취임, 법안과 법 운영 등에 관해 연구했으며, 이어서 법안연구회를 확대시켜 홍재기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 회장에 취임, 헌법을 속히실행 해 인권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평리원 검사를 잠시 거쳐 곧 특별법원 검사에 취임했다. 그 때 열사는 정부에 인재등용론 제안서를 제출하는 한편 법무대신 이하영에게 권고문을 보내 법조계와 일반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준 열사의 호법정신(護法精神)은 곧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생명적 가치인 법치주의와 준법의식의 실천이었다는 점에서 실천적 선각자의 표징이 되고 있다. 1907년(49세) 도산 안창호(30세)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안중근(29세)의 청으로 진남포의 삼흥학교에서 애국강연을 하기도 했다.
같은 해 이준 열사는 친일파이자 탐관오리인 이하영, 김낙헌을 고발, 공개재판에서 준엄하게그 죄상을 추궁하고, '국채보상연합회' 회장에 취임, 일본에서 얻어온 차관을 상환코자 국민에게 그 필요성을 호소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으며, '자강회(自彊會)' 주최 기독교청년회에서 '생존경쟁' 제하의 국민자각촉구 명연설을 했으며, '한국혼 부활론'을 저작했다.
일제는 이준 열사의 사망에 대해 병사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작고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형을 선고했다.
열사가 가신지 38년째인 1945년에 조국광복이 이뤄졌고, 바로 그 해에 독립협회 사건 때 이상재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 파면된 전력이 있는 독립투사 함태영(뒤에 부통령이됨)선생이 중심이 돼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를 결성했다. 열사가 가신지 55년째인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 파리장서 비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라고 표시된 파리장서 비는 한국유림대표 면우 곽종석선생 등이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낸 기념비로서, 대통령의 희사금과 성금으로 1972년 10월 서울 중구 장충공원에 세워졌다.
파리장서 운동은 1919년 3·1운동 직후 전국 유림대표 곽종석(1864∼1919)·김복한(1860∼1924) 등 137명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도 불린다.
이 사건으로 서명자 대부분이 일본 경찰에 체포, 구금됐고 곽종석 등은 감옥에서 순국했다.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는 "3·1운동 당시 33인 중에는 본인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리 서명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파리장서는 유림대표 137명이 모두 직접 서명했고 국내 독립선언 문건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서명해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곽종석 선생의 손자인 곽 회장은 파리장서운동의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줄곧 강조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5명은 친일로 변절한 것이 역사적 사실인데도 3·1운동 대표자로 33인을 통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국제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것은 파리장서가 유일한 만큼 합당한 공적을 평가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곽 회장은 73년 장충단공원에 파리장서비가 세워진 뒤 30년 넘게 사비를 털어 파리장서 운동 알리기에 매진하고 있으며,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현재 경남 거창, 밀양 등 전국 7곳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순국열사 이한응선생 기념비
이한응 열사(1874∼1905)의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로서 용인시 이동면에서 출생하였다. 현재 묘소의 위치는 이동면 덕성리 산 70-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5년도에 설치한 촛대석, 곡담, 묘비가 있고, 전해오는 유품으로는 친필유서, 일지, 유방첩 등이 있다. 28세 때인 광무 5년(1901) 3월 주한 영국·벨기에 양국공사관의 참사관으로 부임했으며, 광무 6년(1902)에는 공사 민영돈이 귀국함에 따라 특명서리공사에 임명됐다.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있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기울어져만 가는 대세를 일개 청년 외교관의 노력만으로 돌이키기는 어려웠다.마침내 광무 9년(1905) 4월 9일 유서를 남기고 타국 땅에서 순절했는데 방년 32세 때였다.
이한응 열사의 순절은 국내외의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 공사의 유해는 광무 9년 7월 고향인 용인에 안장됐으며,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瓣)에 추서돼 장충단에 배향됐다.
해방이후 '순국열사 이한응선생 추모회'가 만들어져 '유사(遺史)'가 간행된 바 있고, 그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호국 보훈의 달과 신록의 계절인 6월을 맞아 대한민국의 심장이자 혼이 담긴 남산의 호국열사들의 흔적을 찾아봤다. 남산르네상스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순환도로에는 실개천이 완공돼 일찍 찾아온 더위 속에서도 남산을 찾는 사람들은 우거진 녹음과 함께 깊은 산 속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본지에서는 2회에 걸쳐 남산에서 숨 쉬고 있는 호국열사들을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