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재선거 중구청장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최창식 신임 구청장은 1952년 5월 23일 2남 3녀의 장남인 동시에 최씨 16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충북 영동군 학사면 지내리는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대한민국의 가장 오지이며 버스에서 내려 1시간 30분 동안 산길을 걸어야 하는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다. 그런 곳에서 자란 최 후보는 시골의 순박함이 그대로 묻어있는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개구쟁이면서도 모범생으로 성장한 그에게 그 시대 모든 일들을 겪는 어려움은있었지만 가난은 역시 풀지 못한 난제였다. 시골길 10리를 걸어 다니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이미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져 전국에서 가장 학비가 적게 드는 곳을 찾아야 하는 어려움 속에 국립 경기공업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됐고, 맏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 속에 일곱 식구가 서울로 올라와 무허가 단칸방에서 가난과 사투를 치렀다. 찢어질 듯이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맏아들인 그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성실한 학생으로 알려져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두 군데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흔한 빵집 한번 제대로 드나들지 못하고,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성실함과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충청도 특유의 뚝심으로 성균관대학교 토목학과에 진학을 했지만, 그에게 가난은 역시 떨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던 스케이트 신발을 단 한 번도 신어본적이 없었으며, 당구장 한번 출입한 적이 없이 아르바이트와 학업에 매달릴 수 밖에 없어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온다고 한다. 그 어려운 학창시절에도 오로지 살 길은 공부라고 생각해 9급 공무원에 합격을 한 후, 영등포구청 토목과에 말단 직원으로 근무를 한 후, 해군사관학교 사관후보생과정을 수료해, 대한민국해군 장교로 근무를 하게 됐다.
군 복무시절에도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아 1977년 12월, 마침내 제13회 국가기술고등고시에 당당히 합격을 하게 된다. 어려운 형편에서 자식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부모님께서는 그때 그 기쁨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군 제대 후, 서울시청 도시계획국 구획정리과에 근무를 하게 된 그는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일제시대 때부터 문제가 돼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중구 신당동의 장기미결 토지정리는 지금도 공무원 사회에서 회자가 되고 있으며, 연세가 많으신 신당동 어르신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고 있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도로국에 근무하면서 남산1호 터널 확장과 동부간선도 서부간선도로 올림픽대교 등의 건설을 진두지휘했으며, 특히 중구 구민들의 숙원사업이던 신당고가도로를 철거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실력으로 인정을 받게 된 그는 승승장구해 서울시 지하철건설 본부장을 역임. 5호선(동대문역사공원역, 청구역)과 6호선(버티고개역, 약수역, 청구역, 신당역)을 건설하면서 서울의 중심지역인 중구지역을 타 지역보다 배려했으며, 지하철 3·7·8·9호선 등의 건설을 진두지휘해 서울 도시철도망 확충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높여왔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 건설안전본부장을 맡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과 함께 청계천복원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삼일고가 철거, 서울광장과 버스중앙차로를 만들어 서울시민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자, 이명박 서울시장이 "머리를 아는 사람은 최창식"이라며 서민들의 주거환경을 바꾸라는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뉴타운 사업본부장으로 발령을 받아, 노후 시가지에 대한 정비 모텔로 뉴타운사업에 뛰어들어 집 없는 설움을 겪는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을 갖게 했으며, 명동지구 발전계획, 북창동지구 활성화 사업추진 등 오늘날 서울의 모습으로 바꾸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현 오세훈 서울시장의 시정 동반자가 돼 거대 서울특별시의 행정 부시장으로 임명을 받게 된다. 임명장을 받는 날, 많은 분의 기대와 축하 속에 구석진 자리에서 남편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흘리던 아내의 눈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서울시 부시장인 최창식이 있음을 알기에 그는 말없이 아내의 손을 잡은 채 고마움을 전달하던 그날을 좀처럼 잊지 못했다.
부시장으로서 그가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도전했던 일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세운지구 재정비촉진계획, 그리고 남산 르네상스와 한강 르네상스 등 시책 사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렇듯 서울시 행정을 진두지휘해 서울을 세계 어디에 내놔도 결코 뒤지지 않는 모습으로 바꾸었던 그의 열정적인 모습은 많은 이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배경을 보면 단순히 그 혼자만이 이뤄낸 일이라 할 수 없다. 가장 먼저 그의 부모님의 정성과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는 그의 가까운 지인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 밖에 없었던 그에게 아내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헌신했다. 신혼초기 빠듯한 벌이로 대가족의 외아들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기에도 급급했지만, 이 모든 짐마저 아내에게 맡긴 후, 그는 오로지 앞만 보고 도전을 계속했다.
이제 그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중심이 되는 중구청장으로서 중구를 위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경력과 수많은 경험은 침체돼 있는 중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가 중구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것은 바로 날로 침체 되어가고 있는 중구를 발전시켜야 서울이 발전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살림살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이제 중구를 어떤 모양으로 발전 시켜 나갈 것인지 많은 이들의 설렘 속에 새로운 도전을 위해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