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이용하다보면 계단에서 쭈그리고 앉아 구걸을 하는 노숙자들이 가끔 있다. 특히 서울역 주변 등에는 곁에만 가도 냄새가 나고 위협을 느낄 만한 노숙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노숙자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정부에서는 이들을 그냥 방치해 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실질적인 대책이 세워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민간인이 선뜻 구제에 나서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바로 중구 회현동 대한예수교장로회 세계선교교회 김호순(67) 목사다. 김호순 목사는 집이 없어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들을 '하느님께서 주신 아들'로 여기며 머물 장소를 제공하거나 음식을 대접하는 등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다. "99년도에 하느님의 부름으로 목회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밥을 주고, 재우고, 새벽기도와 예배를 하면서 신앙을 통해 자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이들이 어렸을 때 가정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생활고를 겪은 탓에 현재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고 설명했다. 부모·형제로부터 버림을 받고 쫓겨난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들 마음에 사랑이 부족해 생긴 상처를 다시 사랑으로 치유해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다른 어떤 주택재개발사업구역보다 최첨단 시스템으로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갖는 최고의 명품 아파트를 조기에 완공토록 하겠습니다." 지난 23일 구민회관 대강당에서 진행된 만리 제2주택재개발 정비사업조합 정기총회에서 당선된 박정근 신임 조합장은 이렇게 포부를 밝히고 "어려운 지역과 열악한 경제여건 속에서 조합원들에게 최대한의 이득을 줄 수 있는 아파트를 건설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아직도 대부분의 재개발사업구역의 주민과 언론매체에서 재건축, 재개발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는 제도적 미비와 기업들의 과도한 경쟁에 따른 이유도 있지만, 조합 집행부와 조합원간의 내부 갈등과 불신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재개발 조합에서의 비리는 거의 없어지고 있고 있다고 해도 법망을 빠져나가기 어렵게 돼 있어 책임을 가지고 투명한 절차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신임 조합장은 "앞으로 20평형대 임대주택에 원주민을 입주시킬 수 있는 조례가 반드시 제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고민을 안고 절망감에 휩싸여 고통을 받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을 건네서 그 누군가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결국 온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여기서 '천 냥'은 '빚'이 될 수도 '빛'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의 마음의 빚을 '빛'으로 바꿔 희망을 전달하는 데 일생을 바치고 있는 성도교회 박세윤(40) 부목사. 지난 호(본지 248호) 칭찬 주인공이었던 한상숙씨는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고 어려웠을 때 정신적으로 큰 힘이 돼 준 박 목사를 칭찬했다. "목사로서 성도가 힘들어 할 때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1994년부터 교육전도사부터 시작해 목사의 길을 걷고 있는 박 목사는 성도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곤란을 겪을 때가 오면 진심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마음을 치유해주는 역할을 한다. "제가 그들에게 속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속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성도가 있으면 그들이 사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일깨워주는 일이 전부입니다." 지금은 원로목사이지만 40여 년 간 목회자이셨던
"대학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배우고 익힌 기술로 세상에 기여해야 합니다" 강문석 교장은 한양공고 학생들이 각자 지닌 커다란 재능을 넓은 무대에서 맘껏 펼치며 세상에 기여하는 '사랑의 실천자'로 성장하길 바라고 있다. 강 교장은 "우리 학교는 전문적 기술을 가진 인재를 키우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면서 "교육이 충실히 이뤄짐으로써 학생들은 여러 가지 가운데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사려 깊게 설명했다. "미국 대학에 합격한 두 학생도 '대학에 가기 위한 공부'만을 한 게 아니었어요. 컴퓨터 네트워크과 학생으로서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좋은 결과가 이뤄졌어요. 학생들이 자랑스럽고, 또 고마운 마음입니다." 60여년 한양공고 역사에서 처음으로 미국 주립대 합격생을 낼 수 있었던 토대는 사실상 강 교장이 마련했다. 지난 2007년 컴퓨터 네트워크과 신설과 함께 내실 있는 학과운영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강 교장은 미국 대학 입학사정관제를 주시하며 교과방향을 제시했다. 강 교장은 "정보 수집이나 학생 교육은 교사들이 전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한다. 안의사의 유언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당시, 안의사의 묘역이 성역화 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측에 의해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았으며, 매장된 위치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윤택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해서 아명을 "응칠"이라 하였으며, 독립운동 당시 이 아명을 사용하셨다고 한다. 훗날 조부께서 진중한 사람이 되라고 이름을 중근으로 하셨다고 한다. 부친의 영향으로 천주교 교리를 습득하여 집안 전체가 천주교 교인이 되었으며 안중근 의사도 돈독한 신앙심으로 전교활동 등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애
회현체육센터 앞 작고 오래된 미용실에는 하루 종일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3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손님의 머리 스타일을 매만져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경동 미용실 한상숙(57)씨는 많지 않지만 한 분 한 분 계속 들어오는 손님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손님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요." 무슨 소문이 났을까? 단지 머리를 잘 한다고 해서 소문이 난 것은 아닐 터. 지난 호(본지 247호) 칭찬 주인공이었던 김연아씨는 장애인들의 머리를 해주면서 값을 저렴하게 받는다는 한씨를 칭찬했다. "특별히 장애인을 도와야겠다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됐어요." 특히 시각 장애인과 뇌성마비 장애인을 대상으로 머리를 해준다는 한씨는 무료봉사보다도 손님 개개인의 형편에 맞게 저렴한 가격을 제시해 손님이 부담을 덜 느끼도록 하는 센스를 지녔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입대한 이후부터는 군인을 보면 모두 아들처럼 느껴져 장애인 뿐 아니라 군인에게도 할인가로 머리를 깎아준다. 얼마 전 성도교회 조용섭 목사로부터 '평생감사'(전광 지음)라는 책을 선물 받은 이후, 한씨는 그
"장애인이나 노인 등 몸이 불편하신 분이 옆에 계신다면, 그리고 내 손길이 필요하다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지난 호(본지 245호) 칭찬 주인공이었던 김혜진씨와 함께 중구길벗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연아(54)씨는 마치 흐르는 물처럼 남보다 자신을 낮추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지난해 6월 희망근로를 시작, 12월 초까지 계속하다가 동료들의 추천으로 올해 정식 직원으로 같이 일하게 됐다는 연아씨는 이곳에서 일하기 전, 3년간 대학병원과 노인장기병원에서 개인간병을 맡으며 환자들을 돌봐왔다. "예전에는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면서도 절대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어요. 물질로만 100퍼센트 행복할 수는 없거든요." 남들처럼 '보편적인 성공'을 위해 살아왔던 지난 날을 회상하던 연아씨의 얼굴에 불현듯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즐거워요. 높은 곳을 봤을 때는 항상 내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졌지만 저보다 낮은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제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예전에 병원에서 환자들의 간병을 하면서 연아씨는 죽음과 맞닿은 환자가 얼마
"대기업 좋은 부서 취업하고도 대학미련 남은 모습 안타까워" "꿈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하면, 그 꿈은 이뤄집니다." 김종관 교장은 성동공고 학생들이 목표를 가지고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나가길 바라고 있다. 김 교장이 정성껏 심고 가꾸는 꽃에 대한 마음은 곧 학생들이 올곧게 자라길 소망하는 사랑과 같은 듯했다. "장미 화단을 손질하고 있었어요. 학생이 지나가며 '장미가 보기 좋네요'라고 쾌활하게 말하며 인사했죠. 처음 봤을 때 고개도 잘 들지 못했던 학생이었는데 어느새 자신감 있게 훌쩍 성장한 모습이 보였어요." 대학진학을 중요시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에 대해 전문계고 교장으로서 안타까운 마음도 드러냈다. "입학할 당시 가능성이 희박했던 학생이었는데 대기업의 좋은 부서에 취업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졸업식 날 학부모께서는 대학 진학에 대한 미련을 나타내시더군요. 그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김 교장은 성동공고에서 세 번째 근무다. 지난 1976년부터 다년간 평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2003년에는 제18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