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6일이면 현충일이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과 순국선열들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날을 6월 6일로 정했다. 해마다 현충일이 다가오면 이 시대의 마지막 실향민으로서 멀지 않은 지역에 고향을 두고도 가지 못하는 애끊는 심정을 가눌 길이 없다. 지난 5월 11일에는 중구실향민 가족 80여 명이 강화도 평화전망대를 찾아 망향제를 올렸다. 이는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서 매년 봄, 가을에 열고 있다. 10월에는 이북 부모님들의 시제를 지내고 있다. 내가 살던 고향은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리현리 초도다. 현재 초도는 북한군 주요군기지로 활용하면서 비행장, 잠수기지 등 육해공군 3천 여명이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북한 김정은이 초도를 찾아 군사기지를 시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초도는 38선 이북지역에서 둘째가는 섬으로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리현리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은 31.4㎢에 달한다. 숙종재위(17년) 군작전 지휘부 및 그 관할처를 설치하여 예로부터 국방상 요충지였으며 첨사(僉使) 감목관(監牧官)이 배치되어 있던 곳이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파란하늘에 나부끼는 태극기! 참으로 소중하고 존엄한 우리의 국기이다. 국기문제가 처음 거론된 때는 1880년(고종 17년)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중국용기를 군기와 국기로 사용하도록 권고한 내용에 따라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자문을 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구체화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 82년 4월6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때 조선의 전권부관 김홍집과 청사 마건충 사이에서 국기문제가 재론됐다. 마건충은 중국 용기의 사용을 반대하고 11일 흰색바탕 중앙에 반홍반흑의 태극도와 그 둘레에 팔도를 뜻하는 검은색 팔괘 및 빨간색 주연이 있는 도식을 제안하였다. 같은 해 8월9일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 박영효가 메이지마루를 타고 일본에 가던 중 영국인 선장과 상의하여 태극기 대·중·소 3본을 만들었으며, 태극도가 마건충이 제안한 반홍반흑에서 반홍반청으로, 팔괘가 사괘로 발전하였다. 박영효는 8월22일 태극기 소본과 국기제정 사실을 군국기무처에 보고하였으며 83년1월27일 통리교섭 통상사무아문의 장계에 따라 팔도사도에 행회(行會)함으로써 태극기가 정식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사괘와 태극양의
"많은 금액으로 불우이웃돕기를 한 것도 아닌데 인터뷰라니요. 쑥스럽습니다" 2012 중구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 및 복지박람회를 앞두고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써 달라"며 50만원의 성금을 중구장애인협회에 쾌척한 신영자(58) 사장. 그는 이로 인해 지난 17일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따뜻한 사랑과 아름다운 봉사정신으로 지역사회발전과 장애인의 자활 자립 및 복지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최창식 구청장 표창장을 받았다. 중견기업에 근무하던 남편이 IMF당시 구조조정으로 인해 퇴사한 뒤 사업실패를 거듭하면서 무일푼으로 전락했다. 심기일전한 뒤 황학동 롯데캐슬 건너편 숭인동에서 가판을 마련해 1천원짜리 의류를 파는 노점을 시작했다고 한다. 매출이 거의 없자 노점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한 평도 안되는 구멍가게를 오픈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동인구가 거의 없는 죽은 상권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현재 숭인동 일대는 정년퇴직자나 노인, 노숙자들이 모여들어 의류나 만물 등을 저렴하게 파는 곳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가게에 손님도 늘어났다고 한다. 한푼 두푼 모아 생계를 이으면서도 가게
지난 17일 열린 제197회 중구의회 1차 본회의에 앞서 5분 자유발언에 나선 이혜경 의원(의회운영위원장)은 "관내의 특성화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학생들의 취업에 대해 우수한 성과를 거둔 학교를 선정해 취업 선도학교로 지정하자"며 이에 대한 '육성 및 지원 방안'을 제안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중구 교육사업의 방향은 인문계 학교와 특성화고 중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특히, 중구청 취업지원과에서 특성화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성화고 취업캠프'를 올해 6월 개최할 예정이나 특성화고 학생들에 대한 적성개발, 진로설정, 취업지원 등에 대한 프로그램은 미비하다는 것이다. 또, 인문계 학교와 비교해 특성화고에 대한 지원은 전무하며, 가정형편의 어려움에 따른 학생들의 적성 및 향후 진로 미설정 등을 사례로 들며 관내 특성화고 실정을 설명했다. 중구는 현재 소상공인, 중소기업, 중견기업이 포진돼 있어 특성화고 학생들의 맞춤형 교육을 통해 취업률을 높이며 고졸자들의 안정적인 사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 이 의원은 "상권이 밀집해 있어서 현장실습이 용이하고 체험 활동과 기업과의 연계 교육을 실시할
현대 사회는 정보화의 홍수 속에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하고 발전해 가고 있다.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들도 역시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기성세대들이 성장해 왔던 사회보다 많은 정신적 육체적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 노출돼 있는 청소년들을 주체적이고 민주적이며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일이 매우 시급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소외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극단적인 자살이나 따돌림(일명 왕따), 집단 패싸움 등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급격한 사회 변동, 사람간의 갈등 심화, 그리고 부부 갈등으로 인한 이혼이 급증하면서 청소년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소년 문제는 가출, 폭력, 금품 갈취 등 다양화되고 있으며, 우발적인 상태를 넘어 조직화, 흉포화 돼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이 정신적인 불안에서 벗어나서 안정되고 활기에 찬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 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 같은 청소년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한 해법을 찾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 15일 충무아트홀에서 아동·청소년의 정
김원숙 장원중 개방형 공모 첫 교장 독서토론·영재학급 등 혁신방안 밝혀 "현재 롤 모델로 삼고 있는 학생모의자치법정과 함께 독서토론 수업을 도입해 경쟁력 있는 장원중학교로 만들어 명문학교로 거듭 나겠습니다" 지난 3월 개방형 교장 공모제를 통해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장원중 첫 초빙교장으로 임용된 김원숙(57) 신임 교장은 '잠재력을 찾아내서 경쟁력을 갖추게 하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웃으면서 맞이하는 정감있는 학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김 교장은 "일부에서는 작은 학교에 왜 가느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막상 교장으로 부임해 보니까 학생들과 교사들의 정이 넘치고 소통이 잘되는 학교로 너무 잘 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학교를 특화시킬 수 있도록 선유고에서 시행했던 영재학급을 도입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지역적 문화적 혜택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으며, 표현력의 시대에 걸맞게 전교생들을 대상으로 많은 책을 읽고 토론할 줄 아는 인재로 키우는데 주력하고 싶다"면서 "올해는 교사들의 토론기법 연수를 통해 토론 방법
살아있는데도 종중에서 공적비를 세워준 정명준 옹. 종중·지역발전 공헌 공로 전남 구례군 광의면 대전리 상대부락 마을 안 경주 정씨 대전 종중 사당 앞에 지난 4월 공적비가 세워졌다. 이 작은 공적비가 눈길을 끄는 것은 화려한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가 아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경주 정씨 종친과 주민들의 마음이 알알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살아있는 사람에게 공적비는 드문 일이다. 이 비문의 주인공은 현재 신당동에서 14년째 생활하고 있는 정명준(83) 옹. "공적비는 내겐 너무 과분하다. 해 왔던 일에 비해 너무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나이 25살, 어린 나이에 마을의 이장이 됐다. 6·25시절 국가의 부름을 받고 마을사람들이 징병이 된 터라 자연스레 그가 이장 직을 맡게 된 것. 70∼80년대 글을 잘 모르던 시절에는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마을공헌의 첫 발걸음을 뗀 것이다. 특히 정 씨는 마을 내 개발위원장을 20여년 동안 맡아오면서 지역 발전에 앞장섰다. 당시 새마을 사업 때문에 곳곳에서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 도로확장 공사를 할 때에는 대지를 양보해달라고 주민들을 설득해
나이 들어 흰 백발 친구들이 모여 소주한잔 할라치면 늙어 신세한탄과 지내온 이야기들을 하지만, 종말에는 장수보다는 얼마나 깨끗하고 편안하게 남에게 폐 안끼치고 죽을 수 있는가로 화제가 모아지기도 한다. 10년 넘게 중풍 걸린 아내 수발을 하며 고생하는 이야기, 늙은 친구 자리보전하며 죽을 날만을 기다린다는 이야기에 살만큼 살았으니 흉하지 않게 눈을 감을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들도 하곤 한다. 지나가는 말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식하면 장수한다는 옛말은 과학적으로도 검증된 유일한 장수방법이다. 옛날과는 달리 이제는 90세를 넘어 100세까지 장수한다는 세상이다. 젊었을 적에 소식과 운동으로 건강도 지키고 노후자금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 역시 먹는 것을 좋아하고 많이 먹는 것이 습관이 돼 소식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젊을 적에 65㎏이던 몸무게가 80㎏이 넘어 90이 넘었으며, 목욕탕에서 불룩 나온 배 때문에 ET같기도 했다. 몸이 비만해지니 달리기는 물론 걷기도 힘들었으며, 몸무게가 늘어나니 퇴행성관절염으로 무릎이 불편해 10여년을 고생했다. 의사의 권유로 식이요법과 운동을 병행해서 현재의 75㎏까지 줄이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