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역사의 뒤안길’ 발간

중구문화원…중구향토사 자료 11집

중구 정동은 한적한 덕수궁의 모습과 함께 미국 대사관저와 러시아, 영국대사관이 몰려있는 강대국의 총성없는 정보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개화기에는 아관파천의 역사적 격변 현장이자 영국ㆍ미국ㆍ러시아ㆍ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집중된 정치 1번지였다.

 조선시대부터 개화기까지의 정동 모습을 담은 책자가 발간됐다.

 

 중구문화원은 중구 향토사자료 제11집 ‘정동, 역사의 뒤안길’을 발간했다.

 

 서울역사문화포럼 박경룡 회장이 2년여 동안 중구 정동 일대의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해 시대와 장소별로 정리한 이 책은 정동과 서소문동, 순화동, 의주로1가, 충정로1가, 태평로 등 정동 일원 지역의 역사 뒷모습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정동(貞洞)은 구 러시아공사관 부근(정동 125-1)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貞陵)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정동은 구한말 영국ㆍ미국ㆍ러시아ㆍ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집중돼 근대적인 외교타운이 형성됐다. 그리고 정동제일교회ㆍ성공회성당ㆍ구세군본관 등의 종교시설이 들어서 서양 문물이 전해졌으며, 배재ㆍ이화학당 등 개화 교육의 요람지로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던 비운의 장소인 중명전이 자리한 우리나라 근대사의 영욕의 역사를 지켜본 장소다.

 

 정동은 개화기 초부터 ‘양인촌(洋人村)’이라고 불렸다. 코 크고, 키 큰 외국인 공관원, 선교사, 상인들이 이곳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동에 서양풍의 건축물을 지었다. 그래서 덕수궁 주변으로 외국 공관, 학교, 교회, 병원, 호텔, 클럽 들이 자리잡게 됐다.

 

 이러다보니 정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시작된 것이 많다.

 근대 교육이 시작된 곳(1885년 8월, 배재학당)이며, 처음으로 한글 신문(1896년 4월7일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방송국(1926년 2월16일 경성방송국)이 들어선 근대 언론이 시작된 곳이다.

 

 처음으로 활자에 기름을 묻혀 책을 출판하고(1889년 삼문출판사) 처음으로 여성병원(1888년11월, 보구여관-현 이대부속 동대문병원 전신)과 민간병원(1885년 9월, 정동병원)이 설립됐다.

 

 처음으로 커피숍(손탁호텔)이 들어서고, 처음으로 개신교회(1888년 9월27일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 전신)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 서소문 이름을 딴 서소문동, 조선시대 서울의 방범을 위해 야경 순찰을 지휘 감독했던 순청이란 관아가 있어 붙여진 순화동, 신의주로 가는 길목인 의주로1가, 을사늑약때 순국 자결한 민영환의 호를 붙인 충정로1가, 태평관의 이름을 붙인 태평로에 대해서도 그 발자취를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