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청계천을 다시본다 ①

중구자치신문 기자 jgnews@jgnews.co.kr 2005.08.04 13:54:53

중구의 젖줄, 청계천 다시 태어나다

 

◇196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 장면.

 

태종천도후 도성 구분 경계선 작용도

일제때 농민상경 무허가건물 짓고 살아

1954년 청계천 포함 하수도 개수 추진

단절된 600년 서울 역사 잇는 연결고리

 

 청계천은 1937년 복개 후 68년 만에 다시 물길이 열리면서 주민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서울 시민들은 복원공사가 시작된 지 1년 11개월만에 통수식과 터널분수등으로 청계천에서 물이 흐르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목격했다. 특히, 서울의 중심인 중구와 종로구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인 만큼 중구민들이 청계천 복원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오는 10월 청계천 복원공사의 준공을 앞두고 본지에서는 △중구의 젖줄, 청계천 다시 태어나다 △청계천 어떻게 달라지나? △청계천 희망을 말한다 등을 주제로 3회에 걸쳐 연재한다.

 

 ▣ 서울의 역사와 함께 해온 청계천

 

 청계천은 북쪽으로는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동쪽의 낙산(낙타산)과 남쪽의 남산(목멱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서울의 중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던 연장 10.92km의 개천이었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종이 그 후 천도를 하면서 도성 안을 지리적으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선으로 작용해온 청계천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의 역사와 함께 흘러가고 있다.

 

 도성 내에 있었던 청계천은 홍수만 나면 하천이 범람해 물난리를 겪었고, 평시에는 건천으로 오염이 심했던 탓에 주민 생활에 위해 요인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컸다.

 

 이에 당시에도 청계천을 메워버리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하지만 태종은 하천을 메우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라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도록 태종 11년(1411)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의 석교인 광교를 세우기도 했다.

 

 세종 때에는 수시로 준설을 하고 수표교를 만들었으며, 물 가운데 수표를 세워 물의 깊이를 측정해 홍수에 대비했다.

 

 그러던 것이 영조 36년(1760)에 20만명을 동원해 개천의 폭을 넓히고, 양변에 석축을 쌓고 수로를 직선으로 펴 현재의 청계천 원형이 완성된 것.

 

 일제시대에는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이 생계를 위해 서울로 몰려들어 청계천 제방(특히, 관교에서 수포교 사이)을 중심으로 무허가 건물을 짓고 살았다. 이로 인해 도시빈민이 증가하면서 하천오염이 심해졌고, 청계천은 전염병과 범죄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해마다 홍수로 인한 인명ㆍ재산 피해가 계속되자 일제는 청계천을 하수도로 기능을 바꾸고, 청계천 남쪽의 일본인 거주지를 보호하기 위해 1913년경부터 청계천과 지류에 대한 준설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1918년에서 1924년까지 청계천 준설 및 지류를 개수하고 1937년부터 1942년에 걸쳐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교간 복개공사가 최초로 이뤄졌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는 정치적 혼란기로 건설 전반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서울시 하수로는 거의 방임 상태였으며 하수로 유지사업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의 재정 상태였다. 이어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역사상 유래 없는 참화를 당했고, 1만2천400m의 하수로 시설도 피해를 입었다.

 

 청계천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전후해 10여년 동안 방임상태로 두어 토사의 매몰이 극심했다. 이에 1949년 광교에서 영미교까지 연장 13km를 3개 공구로 분할해 9월 30일 동시에 하도 개수공사에 착수, 1950년 3월중에 준설을 완료했다. 그러나 이 해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모든 건설사업이 중단됐으며, 1950년 170만명이었던 서울시 인구가 1951년에는 불과 60여만명으로 줄어 계획적인 하천 개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3년 환도한 이후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현실적으로 하천정비와 복개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4년에는 5천256만 환을 투입해 청계천을 포함한 하수도 개수를 추진했고, 1955년에는 광교 상류 135.8m의 청계천 암거 공사를 실시해 일제강점기에 종로구 계동에서 광교 사이의 일부를 복개한 후 첫 번째 복개공사를 실시했다.

 

 이후 청계천에 대한 본격적인 복개공사는 1958년 5월 25일 착공해 1961년 12월에 완공했다.

 

 당시의 청계천 복개공사는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다리(평화상가측)까지 시내 한복판을 흐르는 길이 2천358.5m, 폭 16∼54m의 청계천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했다. 이 방대한 공사가 완성되기까지 총 16억 6천 170만 환의 공사비가 소요되고, 연 24만2천여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그 후 1965년부터 1966년까지 동대문의 오간수다리에서 제2청계교까지의 구간이 복개됐고,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8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마장철교 부근의 복개지에 조성된 주차장 견인소에서부터 중랑천과 합류되는 지점까지는 복개되지 않은 채 흘러가고 있다. 복개된 청계천의 위생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청계천 양안에 차집관거 공사를 1984년에 착공했으며, 1992년에는 하수도 기본계획을 수립해 하수도 재정비사업이 실시된 바 있다.

 

 청계천에 대한 복구공사가 완료된 이후 복개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상가가 밀집하고, 교통량이 폭주하면서 도심에서 외곽으로 진행하는 새로운 도로의 신설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도로 위에 새로운 고가도로가 만들어졌다.

 

 서울시내에서 고가도로가 제일 먼저 가설된 것은 1968년에 준공된 아현 고가도로이다. 서울시에서는 아현 고가도로 건설의 경험을 살려 청계고가도로 공사를 동시에 추진했다. 그리하여 1967년 8월 15일 공사에 착공해 1971년 8월 15일 완성됐다. 청계고가도로는 총 연장 5천650m에 도로 폭이 16m에 이르렀다.

 

 1967년 청계고가도로 건설에 앞서 이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진행됐고, 그 자리에 거대한 건물군이 들어섰는데 그 건물이 바로 세운상가였다. 1976년에는 동대문운동장 주변의 월남민 밀집지대에 대한 재개발이 단행됐다.

 

 ▣ 철거전 청계천은

 

 청계천 복개도로는 너비 50∼80m, 길이 약 6km 정도로, 1984년 11월 7일 공식노선으로 공고됐다. 관교에서 신답철교에 이르는 청계천 복개구조물 밑에는 너비 2∼5m, 길이 11km의 찻집관거가 설치돼 있었으며, 태평로에서 광교에 이르는 폭 7m, 연장 480m의 하우암거와 청계천로 횡단 3개소에 설치된 연장 310m의 전력구 등 지하구조물이 있었다.

 

 청계고가도로는 남산 1호 터널에서 마장동에 이르는 너비 16m, 길이 5.8km의 왕복 4차로 자동차전용도로로서, 철거 전인 2002년 청계천로 및 청계고가도로 이용차량은 1일 평균 16만8천556대였으며, 이 중 청계천로가 6만5천810대, 청계고가도로가 10만2천746대였다.

 

 1991년부터 2년여간 청계고가도로에 대한 정밀안전진단 결과, 강재빔은 20%이상 부식ㆍ손상되었고, 상판은 전면적으로 불량해 교체 또는 보강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에 따라 1단계로 1994년 8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남산 1호 터널 입구에서 청계 4가에 이르는 2km구간에 대해 전면 보수보강 공사를 실시했고, 1997년 5월부터는 승용차 이외의 차량 통행을 제한했다.

 

 이후 청계4가부터 마장동구간 구조물에 대한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구조물의 안전성 확보를 위해 전면적인 보수가 불가피하다고 판정, 땜질식 보수공사로는 더 이상 시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판단해 청계고가도로와 복개구조물을 걷어내고 청계천 복원을 실시하게 된 것.

 

 청계천복원구간은 동서로 길게 뻗어 4개구 13개동에 걸쳐 있다. 태평로에서 청계 8가에 이르는 청계천 주변에는 필지 규모가 대부분 50평 미만인 건물 6천26동이 밀집돼 있으며, 용도별로는 업무용 29%, 상업용 49%, 주거용 13%, 기타 9%로 구성돼 있다.

 

 청계천 주변은 6만여 점포에 20만이 넘는 상인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대형상권이 형성돼 있으며, 대부분은 도ㆍ소매를 겸하고 있다.

 

 청계 1가에서 2가까지는 주로 업무용 빌딩, 3가에서 4가는 공구ㆍ소방기구ㆍ전자ㆍ전기ㆍ조명 등 도ㆍ소매 업종과 전통의 재래시장인 광장시장ㆍ방산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청계 5가에서 6가는 동대문패션타운 관광 특구 지역으로 의류ㆍ패션 업종이 밀집돼 있고, 7가에서 8가는 신발ㆍ수족관ㆍ조류ㆍ중고 전자ㆍ잡화 판매점 등 다양한 상권이 분포돼 있다.

 

 ▣ 청계천 복원의 의미

 

 청계천 복원은 자연과 인간 중심의 친환경적인 도시공간 조성, 그리고 600년 고도 서울의 역사성과 문화성 회복, 도심노후지역의 활성화 유도, 청계고가 및 복개도로 안전문제의 근원성 해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거 청계천의 복개는 기능성과 효율성이 강조되던 개발시대의 산물로 생태적 환경을 중시하고 있는 오늘날의 흐름에 역행하고, 이로 인해 도시의 경쟁력도 뒤지고 있었다.

 

 이런 청계천을 햇빛과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이 흐르는 자연하천으로 복원함으로써 수변을 생태공원으로 조성한다는데 중점을 두고 본격적인 청계천 복원공사에 들어간 것.

 

 또한 청계천복원은 잃어버린 서울의 원래 모습을 되찾는 일이며, 단절된 600년 서울의 도시역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다시 꿰는 역사적 의미도 가진다.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과 함께 광교, 수표교 등 청계천의 문화유적지를 복원하고, 수표교 다리 밟기, 연등행사 등의 전통문화를 재현, 4대문안 문화유적과 연계된 문화공간을 조성해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주변 낙후지역의 개발을 활성화시켜 성장잠재력을 높이고, 이로 인해 국제금융, 문화산업, 패션, 관광산업 등의 고부가가치 산업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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